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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청춘찬미

by mitsuyui 2024. 3. 4.

ⓒ 뫄님

하여튼, 내 구급상자는 제대로 쉬는 날이 없어. 유이는 작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책상 아래에 있는 파란 상자를 꺼냈다. 붉은색 십자가가 딱 박혀있는 상자의 반투명한 뚜껑 너머에는 수많은 약품이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책상 아래 한구석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 구급상자는 종종 다쳐서 돌아오는 치후유를 위한 것이었다. 미츠야와 사귄 후부터는 치후유를 위한 구급상자이자 미츠야를 위한 구급상자가 되어버렸지만. 둘 다 다치는 빈도가 만만치 않아서, 처음 샀을 때에 비해 훌쩍 줄어든 흔적이 있는 구급약품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이가 다시 한번 한숨을 뱉었다. 이걸 산지 아직 두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줄어들다니. 그만큼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많이 다친다는 증거처럼 느껴져서 속 한구석에서 미묘한 울렁거림 맴돌기도 했다. 당장 지금만 해도 치후유네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이 구급상자를 꺼내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치후유가 많이 다친 것 같다고 이야기하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치후유네 어머니는 일 때문에 바빠서, 차마 붕대 감는 걸 도와주지 못하고 나와버렸다며 혹시 도와줄 수 있냐고 말했다. 유이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전화기 너머로는 전해지지 않을 쓴웃음을 지었다.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면 치후유가 다쳤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항상 그랬다. 자잘하게 다쳤든 크게 다쳤든,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특히나 유이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도쿄 만지회의 소속이 아닌데다가 폭력과도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건지, 치후유의 부상 소식은 언제나 그의 어머니를 통해서 전해 듣는 게 전부였다.
    
그거라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자신이 싫었다. 본인이 직접 말해준다면 당당하게 가서 걱정해주고 챙겨줄 수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는 건 가서 걱정하는 것도 우스워지지 않는가.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걱정이라면 더더욱.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직접 말해주지 않은 거겠지만, 유이는 오히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그가 더 걱정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걸까, 싶다가도 문뜩 속 한구석에서 답답함이 치밀어오르기까지 했다. 나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관계일 뿐인 거야? 유이에게 치후유는 특별한 친구였기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 자신이 특별한 친구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에 놀랐다. 어린애 같은 생각이다. 유이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아직 어린아이라는 걸 감안하자면 이상할 게 없는 생각이었지만 유이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스스로가 이런 유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 이렇게까지 친구 관계에 연연해본 적이 없는데……. 그치만, 친구를 걱정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 유이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치후유가 유이에게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것처럼, 유이는 그를 걱정하고 싶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과도 같은 동생이 다쳤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넘어가 버리는 건 너무 섭섭했다. 그렇지만 치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또 아니라서, 유이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기로 결심했다. 치후유가 아프면 당장 달려가서 치료해주는 것. 그리고 그를 마음껏 걱정해주는 것. 또 다음에는 더 조심하라며 가벼운 타박과 함께 이것저것을 챙겨주는 것까지. 유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여태껏 해왔던 일들이었다. 아주 약간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유이는 커다란 구급상자를 품 안에 가득 안고 대충 전화기를 챙긴 후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목적지는 치후유네 집. 그래도 치후유네 어머니 목소리가 심각하지 않은 걸 보니까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간단하게 약 몇 개를 챙겨주고 오랜만에 이야기도 좀 하면 되겠네, 라고 생각하며 술렁거리는 마음을 빠르게 갈무리한 유이가 발걸음을 서둘렀다. 페케제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치후유네 집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십 분 남짓 되는 시간만이 그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익숙한 집 앞에 선 그녀가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귀에 익은 벨 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집 안에 있을 때는 이 초인종 소리가 날카롭게만 느껴졌는데, 어째 손님 입장으로 오니까 한없이 부드럽게 들린다. 치후유가 준비하고 나올 때까지 조금 걸릴 것 같아서, 무거운 구급상자를 대충 발밑에 내려놓은 유이가 괜히 한 번 더 초인종을 눌렀다. 간만에 치후유와 페케제를 만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서, 유이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짓고는 치후유를 불렀다. 치후유, 나야! 그 목소리에 문 너머로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가 철커덕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치후유! 오랜만…….”
    
유이가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려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별로 심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치후유의 몰골은 상당히 처참해서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얼굴에 온갖 상처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팔이나 다리에도 붕대가 잔뜩 감겨있었다. 아무리 봐도 심각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유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치후유는 팔이나 다리뿐만 아니라 눈에도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한쪽 눈을 가린 붕대에 거의 경악에 가까운 감정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치후유의 다친 모습을 한두 번 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한 수준으로 다친 건 처음이었다. 눈까지 다쳤다니. 설마, 설마 안 보일 정도로 다친 건 아니겠지? 걱정으로 잔뜩 울렁거리는 눈이 그를 향했다.
    
“치후유 너, 너 눈이……!!”
“아. 괜찮아, 이건 오히려 영광의 상처니까!”
    
보기만 해도 아픈 상처들을 주렁주렁 달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치후유의 모습에 유이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렇게까지 크게 다쳤으면 엄청 아플 텐데, 치후유는 계속 아프지 않다며 변명 비스무리한 말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온갖 상처들과 눈에 감긴 붕대, 그 모든 게 유이를 속상하게 만들었지만, 그녀의 가슴에 가장 박힌 것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도 잔상처럼 남는 씁쓸함을 숨기지 못하는 치후유의 표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치후유. 유이는 그가 어떤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며 눈을 맞추었지만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한 치후유는 끝끝내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유이는 아주 약간,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저 커다란 상처들은 전부 도쿄 만지회, 그곳에서 어떤 일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이야기해주지 않는 것은 도쿄 만지회 내부의 일일 때뿐이기에 유이는 거의 확신했다. 물론 유이는 자기가 외부인이라는 사실도 알았고, 치후유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치후유의 가장 친한 친구의 입장에서는 서운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 못 해줘도, 왜 그렇게 씁쓸한 얼굴을 하는 건지, 무슨 고민이 있는 건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치후유는 끈질기게 눈을 마주치는 유이를 슬그머니 피하며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미츠야도 치후유도, 유이가 일반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싸고돌려고 했다. 그런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언제나 미묘한 감정을 느끼던 유이는, 나쁜 생각과 함께 점점 커져가는 섭섭함을 애써 줄이려고 손을 쥐락펴락 해봤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둥글게 말렸다가 펴지는 손이 감정을 증폭시키는 스위치처럼 느껴졌다.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친구인 걸까. 고민도 말 못할 정도로, 치후유에게 자신은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속상한 마음과 동시에 화가 울컥 솟아오르기도 했다. 치후유는 그녀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가족이고, 그 사실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 다친 것만으로도 속상한데 그 상처에다가 영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건 더 속상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그의 모습에 화가 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영광은 무슨! 아마도 치후유네 어머니가 이 말을 들었다면 그는 지금쯤 이승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주먹을 너무 꽉 쥐고 있었던 나머지 손바닥이 살짝 쓰라려서 눈을 찌푸리자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누나? 안 들어와?”
“…….”
    
치후유가 의아한 얼굴로 유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유이는 차마 평소처럼 대꾸할 수 없어서 그저 옷을 꾹 잡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멀쩡한 얼굴로 있을 수가 없었다. 유이는, 그러니까, …… 상처를 받았다. 육체에 생기는 상처 같은 게 아니었다. 마음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유이는 속에서 공허함을 느꼈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치후유와 그의 몸에 잔뜩 생겨난 상처들, 정적만이 가득한 지금 이 상황까지. 모든 것이 속상했지만 지금 가장 속상한 건 이런 상황에서 서운함을 느끼는 어른스럽지 못한 자신이었다.
    
“누…….”
    
치후유가 숨을 삼켰다. 잔뜩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던 그가 당황한 건지 반쯤 집 안으로 들어가 있던 몸을 유이에게로 완전히 돌렸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렁이고 있었기에, 치후유가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속상한 마음에 울기 직전의 상태였지만 막상 우는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유이는 주먹에 힘을 꾹 쥔 후에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치후유에게는 더욱 보일 수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는 더욱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리고 사라진 유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치후유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처럼 그 흔적을 가만히 눈으로 좇다가 거칠게 머리를 헝클이고는 한숨을 뱉어냈다. 함께 해온 시간이 괜히 있는 건 아니라서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뛰쳐나간 건지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바보, 이 바보 멍청이야…. 스스로를 가볍게 타박한 그가 무작정 유이가 향했던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걱정시키기 싫어서 아무런 말도 안 했던 건데, 오히려 그게 더 걱정시키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속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유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가. 언제나 밝은 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이하고 걱정하던 사람을 속상하게 했다는 점이 가장 신경 쓰였다. 그와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팍 치고 올라오기도 했다.
    
치후유에게 유이는 가족처럼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마 누나가 있다면 이런 기분이었겠지, 싶은 생각도 자주 들었고, 실제로도 가족끼리 교류가 잦은 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가족에게 상처를 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치 심장에 돌을 매달아둔 것만 같았다.
    
사과해야지. 이런 상황에서 자존심 같은 걸 세워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이런 당연한 사실을 모를 정도로 치기 어린 사람은 아니라서, 그는 곧바로 유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과는 정반대 방향이었기에 처음에는 조금 헤맸지만, 가장 오래된 친구라는 타이틀이 괜히 있는 건 아니었기에 금세 감을 잡은 치후유는 유이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어릴 적 종종 함께 놀러 가고는 했던 개울. 유이가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동시에, 치후유가 좋아하는 장소기도 했다. 유이와의 추억이 담겨있는 장소니까. 아마도 유이 역시 같은 이유로 좋아하는 것일 거다.
    
치후유의 예상처럼, 유이는 개울 근처에 있던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있었다. 무작정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치후유가 걱정돼서 차마 집에 돌아갈 수는 없었고,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쩐지 아무도 없을 집에 들어가면 계속해서 나쁜 생각만 머릿속에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이는 조금이라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면 돌아가자고 생각하며 졸졸 흐르는 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굴이 축축해서, 찝찝한 불쾌함이 느껴졌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해봐도 계속해서 아까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는 바람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울고만 있는 건 싫었다. 훌쩍거리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낸 그녀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조금 미운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알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더 했다면 그들이 왜 다쳤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뭐람. 유이는 아무것도 몰랐다. 정말 말 그대로, 치후유가 왜 다친 건지도, 그의 얼굴이 어두웠던 이유도. 그러고 보니까 요즘 미츠야의 표정도 안 좋았지. 유이는 입을 삐쭉거렸다. 다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시원한 바람을 아무리 맞아도 속 한구석은 점점 답답해져 가기만 했다. 걱정은 되는데, 무슨 일인지 알 방도는 없어서 울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유이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이유 정도는 너무나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미츠야와 치후유는, 유이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면, 그들을 걱정하느라 괜히 감정 소모하지 않아도 되니까.
    
“둘 다 바보들이야…….”
    
그래도, 차라리 모든 걸 알고 걱정하는 편이 좋았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평화라고 생각하며 꿈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작은 돌멩이를 발로 굴리며 의미 없는 행동을 하고 있던 유이의 뒤로, 치후유의 부름이 들려왔다. 누나, 누나! 그 목소리에 유이는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찾은 건지, 그는 가쁜 숨을 한껏 내뱉으며 무릎을 잡고 헉헉거리는 중이었다.
    
“누나, 한참 찾았어.”
    
이제 가을인데, 얼굴은 더운 것처럼 빨갛다. 몇 번 숨을 고르던 치후유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유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돌덩이의 서늘함이 어쩐지 유독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서 유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 주변은 빨갰다. 울었다는 사실이 반박할 여지도 없이 확실해서, 치후유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울었구나. 어쩐지 입을 떼는 것이 조금 더 힘들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영 놓쳐버릴 것만 같아서, 치후유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미안해, 걱정해서 와줬을 텐데 그런 말 해서.”
    
유이는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치후유를 잠시 응시하다가 개울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작은 돌을 주워 투명한 개울에 툭 툭 던지며 수면에 파동을 일으켰다. 이렇게 찾아와서 사과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았기에 무어라 화를 내기도 그랬다. 치후유에게 미안한 마음이 살그머니 피어오른 것도 한 몫 했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적어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었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알려줬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이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고민해주고 괴로워해 줬겠지. 그 사실을 치후유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숨겼던 것이다. 함께 고민해주고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라서.
    
염려해주는 것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자신을 생각해주는 이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치후유가, 그리고 미츠야가 유이를 걱정하는 것처럼 그녀도 그들을 걱정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들이 다친 소식을 듣게 되는 건 싫었다. 직접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이잖아. 유이는 적어도, 모든 걸 알지는 못해도 다쳤다는 이야기 정도는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일반인이기에 듣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모든 걸 말해주지는 못해도 괜찮았다. 그저 속상할 때 옆에 있어 줄 수 있고, 힘들 때 도와줄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었다. 믿음직스럽고 지지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 알면 됐어. 나도, 그렇게 갑자기 가버려서 미안해.”
    
눈이 마주쳤다. 오랫동안 봐온 익숙한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쑥스럽고도 머쓱한 기분이 들어서 유이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마찬가지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결국 둘 다 웃음을 터트려버린 것과 동시에 미묘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유이는 조금은 편안한 얼굴로 치후유에게 넌지시 이야기했다.
    
“있지 치후유,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는 않을게. 그치만 아프면 아프다는 것 정도는 알려줘.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건 알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네 소식 듣는 거 서운해.”
    
숨을 한 번 크게 마셨다가, 후 내뱉은 유이가 긴장한 건지 축축한 손을 말아쥐었다. 서운하다는 한마디에 무게를 두지 않으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순간 진심이 실려 나가서 조금 무거워져 버렸다. 절대 부담을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 친구잖아? 유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장난스러움 반, 진지함 반이 애매하게 섞인 얼굴에 치후유가 안심 어린 숨을 푹 내뱉었다. 유이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나, 치후유가 힘들다고 하면 어깨 정도는 빌려줄 수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치후유가 힘들다는데 어깨 정도는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었다. 치후유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유이는 믿음직스러워 보이고 싶었기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치후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느새 어른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따지자면 치후유보다는 유이가 어른에 가깝기도 했다. 그녀는 엄연히 누나였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무리라고 해도, 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어서 치후유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된다면 기쁠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그렇게 될 거기도 하고. 쉽게 상상이 가지는 않았다. 아득히 먼 미래이기 때문인 걸까?
    
치후유가 유이의 말에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웃음소리에 유이가 조금은 부끄러운 듯 손가락을 꾸물꾸물 움직였다. 역시 진심을 전하는 건 부끄러워. 답답하게 막혀있던 속이 한결 시원하기는 했지만 마음속에 있는 걸 꺼내놓았다는 생각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치후유에게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한 거고, 지금 전하지 않으면 늦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이야기하지 않으면 영영 모를 수도 있다. 사람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배워온,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잘한 것 같아서,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하며 유이가 말간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누나. 그치만…….”
“그치만?”
“그러다가 나, 미츠야 군한테 미움받을지도 모르는데?”
    
치후유가 새어 나오던 웃음을 삼키고는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장난스러운 말에 유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대신 대답했다.
    
“가끔이라면 못 본 척 넘어가 줄게.”
    
유이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말 본능적으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하기야,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인데,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미츠야. 속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예상하며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를 만나서인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그녀가 환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미츠야!”
“응, 유이.”
    
유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상했던 것처럼,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미츠야가 웃음을 지으며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집 근처에 있는 개울이기는 했지만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유이는 그저 눈을 깜빡거리면서 그를 응시했다. 치후유도 당황한 건지 놀란 얼굴로 ‘미츠야 군이 어떻게…….’와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향하는 의문 어린 두 눈동자에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봐온 시간이 있으니까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의문을 해결해주기 위해 그가 치후유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치후유가 엄청 뛰길래, 걱정이 돼서 쫓아와 봤는데 잘 풀린 것 같네.”
    
미츠야의 말에 유이와 치후유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교차하고, 장난스러운 웃음이 둘 위에 떠 올랐다. 잘 풀릴 수밖에 없었다. 유이는 알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어떤 다툼과 갈등이 생겨도, 둘의 관계가 끊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당연하디당연한 명제였다. 비단 그들이 유한 성격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쉽게 관계를 끊는 편은 아니지만, 맞지 않는 사람을 끊어낼 정도의 냉철함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로의 관계가 영원하리라, 확신하는 것은…….
    
“친구니까!”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한꺼번에 터져 나온 목소리는 유쾌했다. 그래, 친구니까. 그냥 친구도 아니고, 가장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냉정하게 끊어질 수 없는 것이다. 쓸데없는 자존심 같은 걸 세우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과할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기에. 친구 사이에 자존심 같은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아껴주고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쁜데. 그렇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더라도 금방 풀 수 있을 것이다. 오늘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수십 년 후에도 그들의 관계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아니, 어쩌면 지금보다도 돈독해질지도 모른다. 세월이 지나고 함께 한 시간이 더 늘어날수록.
    
친구니까.

(공백포함 10,734자, 공백미포함 8,02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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