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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실종 사건

by mitsuyui 2023. 9. 3.

(뫄님 cm)

유이의 집에 가서 그녀의 부모님을 뵙고 온 지 어언 삼 일을 넘긴 시점. 미츠야는 헤어질 무렵에 한 약속 때문에 말을 꺼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헤어진 날 오자마자 말을 꺼냈겠지만 지금까지 그저 기회만 노리고 있는 이유는 그가 아직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꽉 막힌 집안은 아니라서, 여자친구가 있다고 해서 꾸중을 하거나 타이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조금 부끄러웠다. 대부분의 십 대 남자아이가 그러하듯, 미츠야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말할 때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허송세월 시간을 보내며 있을 수도 없어서, 말할 타이밍만 노리며 기다리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상당히 바쁘게 돌아가는 그의 집은 여유롭게 모두가 모여있을 때가 상당히 드물었는데,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급하게 일을 나가거나 너무나도 바쁜 탓에 대화가 미뤄져 버려서 적절한 타이밍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다가온 주말의 점심. 모처럼 가족 전체가 한자리에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미츠야는 마나의 컵에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며 분위기를 살폈다. 유이에 대해서 말하기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었지만, 미츠야는 차마 말의 서두를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래, 사실 주말이 오기 전까지 말을 꺼내지 못한 이유에는 바쁜 일상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잠깐이라도 이야기할 시간이 났을 때 바로 말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러지 못한 이유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던 미츠야가 오랜 시간 동안 말을 고르다가 계속해서 말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쳐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하늘이 돕기라도 한 건지, 계란 후라이를 뒤적거리고 있던 루나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더니 동그랗게 뜬 눈으로 미츠야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오늘은 그 예쁜 언니 안 와?”
“예쁜 언니?”
  
루나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미츠야가 아니었다. 그의 모친은 의아하다는 듯이 두 눈을 깜빡이며 루나를 바라보다가 미츠야를 향해 시선을 옮겼고, 그 시선 끝에는 그의 당황한 얼굴이 있었다. 미츠야가 자라는 과정을 전부 지켜본 그녀는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퍽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그리고 아마도 그 예사롭지 않은 일은 루나가 말한 예쁜 언니와 진득하게 연관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미츠야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건지 귀를 약간 붉히며 눈을 피했다. 그러나 기껏 생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서 잠시 속으로 말을 고르다가 고심 끝에 결정한 말을 조용히 내뱉었다.
  
“… 여자친구.”
  
단단히 마음을 먹고 말한 것이고, 어느 정도는 지금이라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단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주제에 머쓱한 건지 손이 자동적으로 뒷목으로 갔다. 쑥스러울 때마다 뒷목을 쓸어내리는 미츠야의 버릇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음흉한 미소를 지은 그의 어머니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추임새 비스무리한 것을 내뱉었다. 어머. 놀리고 싶다는 기색이 잔뜩 담긴 한 마디에 미츠야가 빨갛게 변해버린 얼굴을 건조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집에 초대하고 싶다는 말을 하면 저 웃음 가득한 얼굴이 더 만개할 것만 같아서, 순간적으로 주제를 돌리고 싶어졌지만 유이의 말간 얼굴을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유이를 소개해 줘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쑥스러움을 꾹 눌러서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 이유라 함은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집에 초대하고, 부모님께 소개해 주는 이 과정이 상견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설레발이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지만,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결국에는 십 대 남자아이일 뿐이었기에 좋을 수밖에 없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허겁지겁 가리고 있던 미츠야를 바라보던 가족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그는 마른세수를 멈추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오른 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아서 손부채질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은 후에야 제대로 된 사고가 될 수 있었는데, 그의 모친은 계속해서 숨죽여 웃다가 그가 어느 정도 진정하자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이야기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반대할 생각도 없었고, 학업에 집중해야 하니 나중에 만나라고 할 생각도 없었기에 그리 진지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아이가 다 커버린 것만 같아서 감회가 새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엄마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커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과 사귀게 되며, 여자친구를 소개해 주는 건지.
  
“우리 아들 다 컸네, 벌써 여자친구 사귈 때가 됐다니~ 여자라고는 모를 줄 알았는데. 타카시가 이렇게까지 쑥스러워하는 거 보니까 어떤 아이인지 궁금하다.”
“안 그래도 유이가…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엄마를 보고 싶다고 했어. 음, 엄마만 좋다면 시간 괜찮을 때 초대하고 싶은데, … 가능할까?”
  
그 말에 요즘 고민하던 게 그것 때문이었냐고 이야기를 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미츠야는 술술 풀리는 상황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휴대폰을 꺼내 유이에게 문자했다. 유이가 언제 무엇을 하는지 거의 꿰고 있었기에 둘 다 가능한 날을 몇 개 꼽아서 연락하자 몇 분 안 돼서 금세 긍정의 메시지가 돌아왔다. 좋다는 말과 함께 귀여운 이모티콘이 유이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게 했고, 미츠야는 불가항력적으로 답장이 오자마자 작게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웃음을 보고 또 잔뜩 놀림을 당한 건 그의 업보라고 할 수 있었다.
  
약속한 당일이 오고, 알람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눈이 떠진 유이는 들뜬 마음으로 옷장을 열었다. 우당탕탕 방에서 나가 씻으니 이른 아침부터 뭐 그리 열심히 준비하냐는 물음이 들려왔다. 이를 닦느라 칫솔 문 입으로 웅얼거리며 미츠야네 갈 거야, 라고 대답하니 그렇게 좋냐며 웃음기가 가득 묻어나오는 답이 돌아왔다. 응, 엄청 좋아. 그 말은 삼켜버리며 입을 헹구고 세수를 한 다음에 옷장 앞에 서서 가장 좋아하는 옷을 찾기 위해 옷장 안에 손을 넣은 유이가 옷장 한구석에서 아끼고 아끼던 옷을 꺼냈다. 화사한 색의 원피스가 괜히 기분을 더 들뜨게 만들었다.
  
일찍 일어난 게 신의 한 수였는지, 준비를 끝낼 때쯤 시간을 보니 어느덧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되어있었다. 더 늦게 출발했다가는 늦어버릴 게 분명해서, 유이는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는 현관문을 열어 밖으로 향했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며 기분 좋게 몸을 달구었다. 잔뜩 신난 그녀의 기분처럼 날씨가 유독 다정했다. 유이는 작게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고, 순식간에 익숙한 길을 더듬어서 미츠야의 집 앞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괜히 긴장하느라 얼어있고 싶지 않아서 지금 당장은 신난 기분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은 숨길 수 없는 것인지, 유이의 긴장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발걸음이 빨라졌다.
  
집 앞에 도착하고, 유이는 핸드폰을 꺼내서 문자를 보냈다. 나 도착했어!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문 너머로 우당탕탕 거친 소리가 나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미츠야가 문 너머로 소리가 다 들렸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던 건지, 약간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뒷목을 쓸어내렸다. 유이는 그 모습에 작게 소리내어 웃다가, 미츠야의 뒤에서 걸어 나오는 이들에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타카시 여자친구인 아키바 유이라고 해요! 어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인사에 미츠야를 닮은 그의 모친이 웃음을 지으며 환영한다는 말을 건넸다. 그녀의 뒤에서 루나와 마나가 작은 손을 흔들고 있어서, 유이는 허리 펴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어쩐지 너무 힘을 주어서 인사를 한 것만 같아서 부끄럽기도 했고, 미츠야와 꼭 닮은 가족들을 보니까 신기하기도 했다. 미츠야가 우리 집에 와서 우리 가족을 볼 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집 안은 몇 번 들어가 본 적이 있어서 눈에 익었다. 미츠야랑 같이 등교를 할 때, 가끔 미츠야가 늦게 나오는 날에는 그녀가 집 안에서 기다렸기에 어느 정도 익숙한 공간이었다. 그들은 짧은 복도를 지나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미리 준비해 둔 건지, 음식이 담겨있는 접시가 깔끔하게 놓여있었다.
  
“저번에 미츠야가 좋은 대접을 잔뜩 받았다고, 꼭 맛있는 음식을 해줘야 한다고 그러던 거 있지. 어찌나 성화인지, 열심히 솜씨 발휘 좀 해봤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유이가 탄성을 질렀다. 정말 이렇게 대접받아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식탁 위는 화려했다. 미츠야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처음 겪어보는 것투성이라서 그런지 하나같이 익숙하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유이는 의자에 앉고는 주변 사람들이 젓가락을 들자 따라 들며 식사를 시작했다. 미츠야는 자연스럽게 물을 따라서 주고 있었고,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마나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 평소에도 오빠 같은 미츠야였지만, 어쩐지 동생들을 챙기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니까 더더욱 어른스러워 보였다.
    
“같은 학교 다닌다고 들었는데, 같은 수예부인가? 아니면 다른 동아리?”
“아, 저는 도서부예요!”
“어머. 그러면 어떻게 만나게 된 거니? 우리 아들한테 물어봐도 영 말을 안 해주는 거 있지~ 아키바 양, 어쩌다가 사귀게 됐어?”
“아, 편하게 유이라고 하셔도 돼요! 으음, 학교에서 만난 건 아니고… 제가 집에 가다가 이 근처에 신사에서 처음 만났어요.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미츠야가 절 도와줬거든요!”
    
어쩐지 익숙한 상황이다. 얼마 전, 유이의 집에 왔을 때 미츠야가 한 역할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상황. 그러나 그때는 미츠야가 설명하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유이가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었다. 전에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천천히 되짚던 유이가 얼굴에 작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츠야와의 두 번째 만남, 그와 함께 보낸 시간, 어떻게 그의 마음을 알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서 그를 좋아하게 된 계기와 그녀가 한 고백까지. 유이는 자신의 부모님 앞에서 서슴없이 애정을 밝힌 미츠야처럼, 마찬가지로 그의 가족들 앞에서 그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이 자리를 빌려 마음을 보다 더 명확하고 가감 없이 전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가 그러했던 것처럼.
    
미츠야의 어머니는 그와 유이의 학교생활에 관심이 많았다. 그건 아마도 바쁘다는 이유로 다른 집보다 챙겨주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미안함과 그래도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을 얻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또, 어느 정도는 훌쩍 커버린 아들에 대한 씁쓸함과 놀리기 위해 놀릴 거리를 찾고 있는 작은 장난기도 있으리라. 유이는 그 궁금증을 전부 풀어주기 위해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한 번에 많은 정보를 정리해서 내뱉으려니까 약간은 과부하가 왔지만, 한편으로는 말하면서 그때의 상황이 다시금 상기돼서 들뜨기도 했다. 물론 루나랑 마나가 듣고 있기 때문에 키스를 한 일이라거나, 아직 어린애들이 듣기에는 약간 쑥스러운 일들에 대해서 말을 고르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언니, 언니, 그러면 언니는 우리 오빠랑 결혼하는 거야?”
“마나는 찬성!”
“루나도! 오빠랑 결혼하면 언니랑 매일매일 볼 수 있잖아! 그리고 언니는 미인이라서 좋아.”
“뭐, 뭐어?! 결혼이라니…. 아직은 먼 얘기인걸…!”
    
말똥말똥 눈을 뜨며 듣고 있던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고 하는 말에 유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잔뜩 당황한 얼굴로 더듬더듬 이야기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은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잔뜩 놀릴 생각이 만만한 얼굴로 미츠야를 음흉하게 쳐다보던 그의 모친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 친다. 어머. 결혼하면 둘이 알콩달콩 하느라 바쁠 텐데, 그치? 그 말에 미츠야의 얼굴도 빨개지자 애써 웃음을 삼키고는 고민하듯 침음 소리를 내다가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여전히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잔뜩 묻어있었다.
    
“엄마는 유이라면 대환영이야. 착하고 귀여운 며느리라니, 완전 나이스지.”
    
결혼할 때 따로 허락받지 않아도 되니 다행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미츠야의 열기가 귀까지 뒤덮었다. 결혼이라니. 아직 성인조차 되지 못한 그들에게는 먼 얘기였다. 저도 모르게 진지한 생각을 해버렸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짓궂은 장난임을 알아차린 그가 외쳤다. 너무 멀리 갔어! 그러나 미츠야도 부정은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좋아하면 어떻게든 가장 가까운 위치가 되고 싶어지는 법이었고, 그걸 가장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관계는 부부였다. 친구로는 도달할 수 없는 관계, 유일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특별한 게 당연한 관계, 나쁜 끝을 맞이한다고 해도 끈끈한 연으로 엮어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관계. 그것이 부부라고 칭해지는 관계였다. 그리고 미츠야는 되도록, 그가 유이에게 있어서 유일하기를 바랐다. 소유하고 싶은 것과는 약간 달랐다. 그 누구로도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에 비해서 덜 이기적이었기에. 그는 그저, 적어도 그녀의 삶에서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소유 욕구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며, 추잡하다. 사랑이라 칭하기에는 역겹도록 자기만 생각한다. 그는 여전히 뜨거운 귀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유이, 너를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어. 그런 비정상적인 마음을 품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맹세해. 하지만 언제나 유일해지고 싶었어. 내가 네게 유일해지고 싶고, 결혼하고 싶고, 그런 미래를 논하는 게 그저 내 욕심일 뿐일까. 미츠야는 생각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어렴풋이 예상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몇 없는 위안이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정신없이 웃고 떠들고 얘기하다가 보니 유이의 휴대폰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 화면에 뜬 엄마, 라는 글자를 확인하고는 양해를 구한 후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응응. 미츠야? 지금 옆에 있어. 아, 할아버지 오신다고? 알겠어. 응. 몇 번의 대화가 오가더니, 전화를 끝낸 유이가 조금 아쉬운 얼굴로 이야기했다. 저기, 지금 할아버지께서 오신다고 하셔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아쉬운 표정을 지은 미츠야의 모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시간도 늦었으니 슬슬 가봐야지. 오늘 정말 재밌었어, 덕분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그 말에 말간 웃음을 지은 유이가 가방을 챙기고는 일어섰다.
    
“저, 정리 도와드리지 못하고 가서 죄송해요.”
“어머? 손님한테 이런 거 시키는 거 아니야. 특히 아들 여자친구인데 이런 걸 어떻게 시켜~ 자자, 타카시! 어서 유이를 바래다주고 와야지. 안 그래?”
“안 그래도 바래다줄 생각이었어. 다녀와서 설거지할 거니까 싱크대에 넣어둬, 엄마. 가자, 유이. 바래다줄게.”
    
현관에서 루나와 마나, 그리고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그가 현관문을 열었다. 문밖은 저번과 비슷하게, 해가 전부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서 깜깜해져 있었다. 별이 총총 박혀있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미츠야가 완전히 닫힌 문을 확인하고는 유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이, 손잡을까? 그 말에 밝은 얼굴로 응! 하고 긍정의 대답을 한 후 주저하는 기색 없이 손을 덥석 잡는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손을 앞뒤로 흔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있지, 오늘 정말 재밌었어. 약간 타카시가 우리 집 왔을 때 이런 기분이었겠다 싶더라. 음식도 너무너무 맛있었고, 루나랑 마나도 귀여웠고! 그리고 어머니랑 대화하는 거 너무 재밌었어. 말도 잘 받아주시고, 호응도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했다니까.”
“우리 엄마도 널 엄청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라.”
“음. 우리 결혼할 때 양가 어른들이 반대하실 일은 없겠다.”
    
자연스럽게 내뱉은 유이의 말에 미츠야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런 미츠야의 행동에 의아한 듯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자각한 건지 얼굴이 새빨개진 유이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튀어나올 뻔한 비명은 꾸역꾸역 삼켰지만, 여전히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보였다. 저, 그게, 아니. 차마 말을 잇지 못해서 생각나는 단어를 내뱉은 유이가 상황을 타계할 방법을 찾지 못한 건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손에 얼굴을 묻는다. 아, 입 밖으로 내뱉었어! 어쩌면 좋아! 손에 묻힌 목소리가 웅얼거리며 새어 나온다. 그 말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미츠야의 정신이 되돌아온 건지, 멍한 얼굴에 웃음이 잔뜩 번졌다. 주택가라 크게 웃지는 못하고, 소리 죽인 웃음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그러네, 유이. 결혼을 반대하실 일은 없겠어.”
“놀리지 마…. 완전 실수였다고! 아, 난 몰라, 어쩌자고 입 밖으로 내뱉어 버린 거야…. 나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겠어…!”
“벌써 결혼 생각이라니, 우리 아직 결혼할 수 있는 나이는 멀었잖아. 조금 기다려야겠네. 내가 열여덟이 될 때까지는 혼인신고 못 하니까.”
“나 놀리는 거 재밌어? 여자친구가 충격에 빠져있는데 놀리기나 하고, 못됐어.”
    
입술을 삐죽거리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유이의 뒤를 쫓으며, 미츠야가 차마 지우지 못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완전 재밌어. 그러자 유이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미츠야는 결혼 생각 안 해봤나 봐? 그 말에 미츠야가 순식간에 유이를 따라잡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서 그녀를 붙잡았다. 반동으로 인해 유이가 한순간에 그의 품으로 끌려들어 왔다.
    
“했어, 나도.”
    
유독 귀가 빨갛다. 세상의 붉은색은 전부 모아둔 것만 같다고, 유이는 생각했다.
    
“엄청 많이 했어.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 많아. 오늘도… 생각했어.”
“그거 프러포즈야?”
“프러포즈라니. 이렇게 하나도 안 멋진 프러포즈는 싫어. 그냥 유이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아, 그냥 이번 건 우리 둘 다 잊자. 딱 하나 둘 셋 하면 잊는 거야. 알겠지? 나는 더 멋진 곳에서 기억에 남는 프러포즈를 하고 싶었단 말이야. 지금은 반지도 없고, 분위기도 없고, 멋지지도 로맨틱하지도 않아. 이건 그냥 무효야, 무효.”
    
그 말에 유이가 입술을 말아 올려 웃으며, 미츠야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까치발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순식간에 짧은 입맞춤이 입술 위에 자국을 남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연한 유이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맑은 얼굴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 없이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목은 부끄러운 감정을 전부 표출하겠다는 듯이 사과를 닮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미 기억에 남았어. 절대 못 잊어.”
“유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했는걸.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타카시, 네 말대로 지금은 결혼 못 하지만… 언젠가 날이 온다면 그때는 내가 프러포즈할게. 멋진 프러포즈에 대한 보답으로.”
    
그러고는 다시 한번 이어지는 입맞춤. 쪽,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입술이 맞닿는다. 미츠야는 눈을 감은 유이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머리를 받치며 시야를 눈꺼풀로 뒤덮었다. 유이, 다음 프러포즈도 내가 할 거야. 그 말은 꾹 삼킨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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