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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일상

by mitsuyui 2023. 8. 16.

( ⓒ 뫄님)

01. 홍실

저기 미츠야. 유이의 부름에 그가 문제집을 향해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험을 며칠 남기지 않은 어느 날, 유이와 미츠야는 스터디를 빙자한 카페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물론 만나서 공부를 하고 있기에 스터디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서로를 만나기 위한 핑계였기에 데이트나 다름이 없었다. 유이가 미츠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붉은 실 이야기 알아?”

유이의 입에서 세간에 흔히 알려진 미신이 튀어나온다. 얼마 전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건지, 흥미로 반짝이는 눈동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인 사람들은 붉은 실로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
“맞아! 얼마 전에 책에서 봤는데, 너무 로맨틱하지 않아? 붉은 실로 이어진 연인은 다음 생에도 이어진다, 완전 낭만적이야!”

잔뜩 신이 난 채로 흥분해서 말하는 유이에 미츠야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유이가 쓰다듬기 편하게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여온다. 붉은 실 이야기에 꽂히기라도 한 건지,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받으면서도 말을 이어 나간 유이가 그에게 물었다. 미츠야, 붉은 실이 진짜 있다면 우리도 이어져 있을까? 그는 유이의 물음을 듣자마자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응. 그러고는 고민 끝에 한 마디를 더 뱉는다. 운명이 진짜 있으면… 우리는 붉은 실로 이어져 있을 게 분명해. 그 말에 유이가 해사한 웃음을 짓는다.

“있지, 진짜 운명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고는 무슨 은밀한 비밀이라도 속삭이는 것처럼, 그녀가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음 생에도 미츠야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 그 말에 그가 설핏 웃으면서 대꾸한다. 유이, 분명 나는 다음 생에도 널 많이 좋아할 거야. 다음 생이 있다면, 내가 너를 찾아갈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에 맞추어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환한 미소가 얼굴에 만연하게 가득 찬다. 유이가 대답했다.

“나도 미츠야를 찾아갈게! 엇갈리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그렇게 말하고는 부끄러워진 건지, 얼굴을 묘하게 붉은색으로 물들이며 문제집으로 고개를 돌린다. 눈에 뻔히 보이는 행동에 그는 속으로 웃으며 멈추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문제집 위로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가 생기며 그들의 사이를 연필 소리가 가득 채웠다.


02. 시선

무언가에 열중하는 미츠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류구지 켄, 일명 드라켄은 미츠야의 시선에 닿는 종착점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언제나처럼 웃고 있는 유이가 유즈하와 손장난을 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미츠야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드라켄은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문뜩 낯선 친구의 모습에 질문을 던졌다.

”요즘 좀 어때.“
”응. 좋아.“

순식간에 돌아오는 대답에 질려 어 그래 좋아 보여, 같은 단답을 내놓았다가 너무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나 싶어서 다시 말을 꺼낸다. 드라켄의 목소리가 고조 없는 이야기를 뱉어냈다. 처음에는 갑자기 여자친구라고 소개해 줘서 놀랐는데, … 그래도 좋다니 다행이네. 여자에는 영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 말에 미츠야가 대꾸했다. 그때는 여유가 없었으니까. 미츠야의 말에는 틀린 말 하나 없었다. 드라켄은 그가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주변에 챙길 사람이 많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말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답을 따라서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서, 고민할 틈도 없이 저도 모르게 그 의문을 내뱉었다.

”지금은 여유가 있고?“
“여전히 여유는 없지. 그때랑 별다른 것도 아니잖아?“

미츠야가 설핏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유가 없는 상황에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잖아. 아주 많이 좋아해서. 그게 나한테는 유이야. 무슨 심리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말이라, 드라켄이 무언의 긍정을 했다. 그들 사이에 정적이 파고들자, 미츠야는 다시 유이로 시선을 돌렸다.

”기분 좋아 보인다. 뭐 좋은 일 있나?“
”평소랑 비슷한 것 같은데?“
“아니, 평소보다 조금 더 기분이 업 됐잖아.”

아무리 봐도 평소와 같은 표정이라, 드라켄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주 보는 건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저렇게 웃고 있었으니까, 별로 평소와 다른 것도 없는 것 같았다. 드라켄이 혀를 내두르다가 툭 던졌다. 그렇게 좋냐. 뻔한 걸 묻는다는 듯이 여상스럽게 돌아오는 대답. 당연하지. 미츠야의 눈동자가 일렁이며 유이를 담았다. 아주 많이 좋아. 그런 말은 목구멍으로 삼키며.

03. 축제

여름의 어느 날, 한창 이곳저곳에서 축제가 시작할 무렵. 미츠야가 불꽃 축제에 가자고 이야기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흔쾌히 수락한 유이가 들뜬 마음으로 유카타를 준비했고, 얼마 남지 않은 불꽃 축제가 시작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축제 당일, 붉은색 유카타를 입고 입구로 향한 유이를 반긴 건 푸른색 유카타를 입은 미츠야였다. 미리 색을 맞춰서 입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서로 반대되는 이미지가 강한 색이라 그런지 맞춰 입은 것처럼 느껴졌기에 유이는 기분 좋은 웃음 소리를 지었다.

미츠야를 이리저리 이끌며 유이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먹을 것도 많고, 놀 것도 많았기에 오늘 하루를 가득 채우자는 마음이 잔뜩 부풀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축제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일본에 온 후에도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축제를 즐겨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하루를 잔뜩 좋은 일로만 가득 채우고 싶어서, 유이는 재밌어 보이는 부스마다 참가했다. 평소라면 그저 식상하기만 했을 금붕어 잡기도, 미츠야와 함께 해서 그런 건지 그냥 웃음만 새어 나와서 유이는 순간 자신이 웃음이 나오는 병이라도 걸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했던 모든 일이 새롭고 신선하고,  즐거웠다.

“유이, 사과 사탕 먹을래?”
“응, 나눠 먹자!”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과 사탕을 한 입씩 나눠 먹으며 부스를 한 바퀴 돌자 끄트머리에 있는 사격 게임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조명 아래에는 검은색으로 깔끔하게 칠해진 총의 몸체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다. 가만히 있는 풍선을 맞추는 게 뭐 그리 어려운 건지, 상품 진열대에는 꽤 많은 상품이 남아있었다. 그 진열대에 놓여있는 괴상한 강아지 캐릭터 인형이 유독 눈에 밟혀서, 유이는 잠깐 그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다 먹은 사과 사탕 막대기를 쓰레기통에 버린 미츠야가 유이의 손을 잡고 사격 게임으로 향했다.

“저거, 갖고 싶어?”

유이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물론 대부분의 사격 게임이 보이는 것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지만, 약간의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도 미츠야는 이번 축제 내내 유이의 기대를 전부 충족시켜 주기도 했다. 부스 주인에게 돈을 건넨 그가 총을 쥐더니 한쪽 눈을 감고 총구를 움직였다.

철컥, 소리와 함께 비비탄처럼 보이는 새하얀 총알이 앞으로 쇄도했다.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분홍색 풍선이 쪼그라들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건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총구를 옮겨서 방아쇠를 당기자 한 개를 제외한 풍선이 전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쪼그라들었다. 그 모습에 부스 주인인 듯 보이는 이가 앓는 소리를 내더니 진열대 앞으로 걸어가며 외쳤다. 뭐 원하는 상품 있수? 하나 고르쇼! 미츠야가 총을 내려놓고는 강아지 인형을 가리켰다. 너무나도 손쉽게, 괴상하게 생긴 강아지 캐릭터 인형을 그녀의 품에 들어왔다.

사격 게임이 마지막 부스인 건지, 그 뒤로는 아무런 부스도 없었다. 마침 불꽃놀이가 시작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들은 잠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었다. 친구들, 그리고 가끔은 동생들과 축제에 와본 적이 있는 미츠야가 작년에 알아낸 비밀 장소라며 유이를 이끌었다. 주변으로는 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었지만, 한가운데는 뻥 뚫려있어서 하늘이 훤히 보였다. 유이는 잠시 별이 촘촘히 가득 찬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미츠야.”

잠시 고민하던 유이가 말을 덧붙였다. 오늘 정말 최고의 하루였어. 그리고 이건 다 네 덕분이야. 나한테 최고의 하루를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그 말에 미츠야가 다정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할 말이야, 유이. 네 덕분에 오늘 정말 잊지 못할 하루였어. 그러고는 유이와 눈을 맞추며 한 마디를 더 뱉어낸다. 있지 유이, 다음 축제 때도 나와 와 줄 수 있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유이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대답에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늘을 수놓는 불꽃과 함께 불꽃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유이는 입 모양을 본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수십 번, 그리고 수백 번 들은 말이었으니까.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녀가 했던 말이기도 했고, 그에 대한 화답으로 받은 말이기도 했다. 좋아해. 불꽃 소리에 묻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목소리가 들렸다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나도 좋아해. 유이의 대답과 함께, 불꽃이 한 번 더 큰 소리와 함께 하늘 위를 밝혔다. 미츠야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도 잠시, 그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새하얀 뺨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몸을 약간 숙여 입을 맞추었다. 쪽,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진다. 불꽃은 여전히 거대한 폭음을 내며 터지고 있었고, 그 빛은 세상에 녹아든다. 마치 여름날의 불꽃이 머리 깊숙한 곳에 각인된 것처럼 말이다. 유이는 이 여름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사랑해 버린 걸지도. 그녀가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발꿈치를 들어 미츠야에게 입 맞췄다.

04. 상처

미츠야가 다쳤다. 물론 유이는 이 문장을 언제나 각오하고 사는 편이었다. 소위 불량이라고 일컫는 집단의 대장이라는 게 그리 안전한 위치는 아니었고, 당장 치후유만 봐도 자주 다쳐서 오지 않는가! 물론 항상 그를 치료해  주는 것은 유이의 몫이었다. 그렇기에 간단한 부상을 치료해주는 것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처음에도 능숙하게 치료해 줬던 것 같은데… 역시 치후유야?“

유이가 얼굴에 난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미츠야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에 유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응. 그러고는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뺨에 난 작은 상처에 밴드를 붙이며 덧붙인다.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또 다쳤어, 너.“

물론 그가 다칠 가능성은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래도 진짜 다쳐서 오는 그의 모습을 보면 언제나 속 한구석이 쓰리다. 치후유가 다쳐서 왔을 때도 마음이 아팠는데 미츠야까지. 유이가 두 배 더 속상해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런데도 뭘 잘했다고, 치후유를 가장 먼저 치료해 줬다는 사실에 미츠야는 그녀의 손끝을 불퉁하게 노려보았다. 한없이 귀엽게만 보이는 그 모습에 유이가 웃음을 터트리며 다치지 않은 미츠야의 등을 안 아프게 두드린다.

“아, 유이, 아파.”
”엄살쟁이. 나 완전 약하게 때렸거든?“

아프지도 않으면서 괜히 앓는 소리를 내던 미츠야가 뒷목을 괜히 쓸어내리며 대꾸한다. 아니, 그냥. 나보다 먼저 유이의 치료를 받았다니, 질투 나잖아. 겉으로는 진심인지 거짓인지 구분하지 못할 말에 유이가 웃으며 대꾸한다. 치후유는 치후유고, 너는 너잖아! 둘은 완전 다르니까 빨리 낫기나 해. 그러고는 딱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다시 한번 등을 때린다. 등에서 느껴지는 강하지 않은 통증에 미츠야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필히 이것은 다정의 무게이리라.


05.
    
미츠야와 함께 등교를 하기 위해서 집 앞에 서 있던 유이는 루나와 마나의 안내하에 그의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평소에는 미리 학교에 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오늘은 미츠야의 모친이 일찍 나가기라도 한 건지 아이들은 준비를 끝낸 채로 식탁에 앉아있었다. 미츠야와 등하교를 하고 데이트를 하면서 자주 본 사이라서 어느 정도 얼굴이 익은 탓일까? 루나는 거리낌 없이 유이에게 말을 붙여 왔고, 마나 역시 간간이 이야기를 이었다. 유이 역시 어린아이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어서 대화가 끊기거나 어색해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미츠야에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멈추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디까지나 지각을 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유이는 미츠야의 방으로 향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주섬거리는 소리에 가방을 챙기고 있겠거니 하는 예상과 함께 유이가 문고리를 쥐고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미츠야, 언제 끝….”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하고 유이는 입을 다물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살구색에 어떤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가방을 챙기고 있을 거라 생각한 소리는 미츠야가 옷을 갈아입는 소리였고, 그녀는 예상치 못하게 그의 몸을 눈에 담아버렸다. 물론 미츠야의 몸은 탄탄하게 근육이 잡혀있어서 보기에 나쁘기보다는 좋은 축에 속했고, 전형적인 잘 짜여있는 몸이었지만 유이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단말마의 비명, 그리고 미안하는 말과 함께 방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 유이에 미츠야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지금 이 문을 열면 유이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변해있을 게 분명했다. 그는 서둘러서 옷을 마저 입고 가방을 챙겨 문밖으로 나갔다. 예상했던 것과 똑같은 색으로 얼굴을 물들인 유이가 마른세수를 하고 있었다.
    
“유이, 나 다 준비했는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훅 다가온 미츠야의 말에 그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빨간 얼굴에 약간은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상당히 당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이가 손부채질로 어떻게든 얼굴을 식히려고 했지만 열기는 쉽게 내려가지 않아서, 그녀는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집 밖을 향했다. 루나와 마나를 데려다주는 내내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츠야는 동생들을 학교 앞까지 데려다준 후에도 여전히 말이 없는 유이를 보며 숨죽여 웃다가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나, 유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데.”
“뭐? 지금 놀리는 거지!”
    
미츠야의 장난스러운 말에 여전히 당황한 기색이 잔뜩 남아있는 유이가 격한 어조로 대꾸했다. 미츠야는 무언으로 긍정하며 어깨를 으쓱였고, 유이는 입을 삐죽이며 미츠야를 가볍게 노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식지 않은 붉은 귀를 머리카락으로 가리며 성큼성큼 걸었다. 물론 뒤따르는 미츠야의 보폭이 더 컸기에 거리는 쉽게 좁혀졌지만, 괘념치 않은 그녀는 계속해서 미츠야를 두고 갈 거라는 듯이 빠른 걸음을 이어갔다.
    
“왜, 보기 싫어? 별로였어?”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완전 짓궂어, 미츠야!”
    
그러면서도 끝까지 싫다는 말은 하지 않는 유이에, 그는 웃음을 삼켰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사실을 알려줄 생각은 딱히 없었기에 유이는 평생 모를 일이었다.


06. 고양이와 데이트의 상관관계

약속 장소를 향해서 걸어가는 유이의 발걸음을 잡아 이끈 건 다름이 아닌 작고 귀여운 고양이었다. 새까만 털에 푸른색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가 여리게 울어대며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고, 한 번 멈춘 발걸음은 고양이의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동동 굴러댔다. 아 어쩌지, 너무 귀여워! 유이가 혹여나 고양이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속으로 외치며 쭈그려 앉았다. 약속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았기 때문에 잠깐 정도는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 것이라는 계산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손을 내밀자 다가와서 작은 혀로 손가락을 핥는 고양이에 그녀의 표정이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리는 건 당연지사. 알레르기 때문에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귀여운 고양이의 앞에서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길거리에서 지내는 고양이 치고는 깨끗한 털을 살살 쓰다듬으며 유이가 작은 고양이와의 시간을 즐겼다.
    
그러던 중, 페케제이 몫으로 항상 가방에 넣어두고 다니는 츄르가 생각나서 고양이를 만지던 손을 떼어내고 가방을 뒤적거리자 검은 고양이가 여린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골목 깊은 곳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화답하는 것처럼 울며 유이의 앞으로 걸어왔다. 유이의 앞에 온 고양이는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얼굴을 비벼댔다. 츄르는 한 개, 고양이는 두 마리. 나눠줘야겠다는 결론이 튀어나온 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이 무색하게, 안쪽에서 고양이 두 마리가 또 튀어나오며 그녀의 앞에 앉아 울어대기 시작했다. 필히 츄르의 껍질을 보고 나오는 것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고양이가 이렇게 많이 등장할 리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츄르를 어떻게 나눠야 할지 고민하면서도 유이의 손을 착실하게 고양이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검은 털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고, 생명의 열기가 손끝을 달구었다. 츄르를 정확히 네 등분을 하기 위해서 껍질을 벗기지 않은 상태에서 손톱으로 눌러 나눠두고, 그다음에 껍질을 까서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고양이의 머리를 살살 긁었다. 기분 좋은 울음소리가 작은 입에서 튀어나온다.
    
“좋아, 결정했어!”
“뭐를?”
“고양이한테 어떻게 츄르를 줄…! 지…?”
“유이,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거야…. 걱정했잖아.”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던 말에 대답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한 유이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목소리의 주인은 미츠야였다. 걱정했다는 말처럼 유이를 찾아다니느라 뛰기라도 한 건지 그가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약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 더워 보이기도 했다. 유이는 당황하며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보고는 벌떡 일어났다.
    
“헉…! 미츠야, 벌써 시간이…. 미안해, 고양이한테 정신이 팔려서 시간을 못 봤어!”
    
비는 것처럼 손을 모은 유이가 당황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물론 약속에 늦은 거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그녀를 보자마자 풀렸지만, 유이의 발치에서 울어대며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고양이 네 마리에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미츠야는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나보다 고양이가 우선이라니, 서운한데.”
    
물론 고양이가 귀여운 건 미츠야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작고 여린 생명체를 귀여워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그도 길 가다가 고양이를 발견하면 쓰다듬기도 했다. 하지만 고양이랑 노느라 데이트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다니, 어딘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양이한테 졌다는 생각에 속 한구석이 씁쓸하기도 했다. 물론 그 말에 유이가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소리야, 나한테는 미츠야가 제일이지!”
    
그 말에 서운함이 녹아내리는 건 정말로,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걸 어쩌겠는가. 말 한마디면 쌓인 감정이 사라져 버리는데. 마음은 자의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할 수 없는 거라서 이마저도 미츠야는 기꺼웠다. 어찌할 수 없으면 그냥 받아들여야지. 그런 생각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픽 웃음을 흘리고는 유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츄르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거야?”
“응, 츄르는 하나뿐인데 고양이는 네 마리라서…. 어떻게 나눠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일단 나눠준 후에 다음에 만났을 때 또 주면 되지. 응? 데이트 끝나고 츄르 사서 또 오자.”
    
안 그래도 일단은 나눠줄 생각이었기에 유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쭈그려 앉아서 츄르 포장지를 벗긴 후, 조심조심 한 조각씩 고양이 앞에 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츠야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지,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니까. 미츠야는 유이를 아주 많이 좋아하기 때문에 지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녀가 그의 옆에 있어 준다면 얼마든지 질 수 있었다. 유이의 감정의 크기를 쉽게 재단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마음이 결코 그녀의 마음보다 적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더 좋아하는 자신이 지는 건 당연한 거다.
    
“손 씻자. 알레르기도 있는데 얼굴에 손대지 말고, 자자, 공원에 손 씻는 곳 있으니까 일단 그쪽으로 가자.”
    
그는 유이를 이끌면서 생각했다. 까짓거 몇 번이든 져버리지 뭐. 매번 져야 한다는 사실에 비참함 같은 건 느끼지 못한다. 그런 감정 따위는 유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전부 덮어버렸으니까. 그러니 그는 이런 패배는 언제나 기꺼웠다.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미츠야는 유이와 함께 골목에서 벗어났다.


07. 다정함
    
유이가 집에서 나오자 미츠야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주치자마자 웃음을 터트린 그들은 간단히 아침 인사를 건네고는 곧바로 학교로 가는 길을 밟았다. 학교는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동안 아쉬움이 커져갔지만, 다행히도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에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볼 수 있었다. 유이는 어제 외식을 했는데 오늘 또 먹고 싶다, 같은 평범한 이야기를 하며 미츠야와 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미츠야가 잠시 침묵하다가 질문을 뱉은 건 학교에 거의 도착한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이. 자신을 부르는 말에 유이가 대답했다. 응? 그 대답에 잠시 유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미술 준비물 챙겨왔어?”
    
미술 준비물.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유이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며 그녀가 앓는 소리를 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미츠야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반응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버렸고, 유이는 당황한 얼굴로 대꾸했다. 까먹었어! 맞다, 미술 준비물 있었지?! 그 말에 미츠야가 자신의 가방에서 물감 세트를 꺼내며 여상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럴 줄 알았어. 이거 써.”
“이걸 내가 쓰면 미츠야는?”
    
울상인 그녀의 표정에 조금 놀려줄까, 라고 생각하던 미츠야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 거는 따로 있어. 유이가 안 가지고 올까 봐 하나 더 챙겨뒀던 거야.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동요도 없는 그에, 유이는 미츠야는 우리 엄마보다 더 알뜰하게 챙겨주는 것 같다는 말을 삼켰다. 다정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기꺼웠다.

(815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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