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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길, 우주, 가로등

by mitsuyui 2023. 9. 3.

(뫄님 cm)

아, 또다. 노을이 질 무렵, 유이를 집에 데려다주던 미츠야는 불안하게 돌아가는 눈동자를 주시하며 속으로 읊조렸다. 티를 안 내려고 하는 건지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봐온 사람으로서 눈치채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평소에는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집으로 향했는데, 이상하게도 요즘의 유이는 집에 가까워질수록 긴장하고 주변을 살피며 눈치를 보다가 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급하게 헤어짐을 고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얕은 관계이거나 신뢰가 부족했다면 마음이 식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미츠야가 유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만큼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유이는 마음이 떠난 상대와의 관계를 기만으로 붙잡고 있을 만큼 배려 없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마음이 떠났다는 명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유이의 알 수 없는 행동은 어디까지나 데이트를 끝내고 집에 데려다줄 때에만 국한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가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마음이 식었다느니 하는 바보 같은 가정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러면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미츠야는 패턴은 어느 정도 알아냈지만 그 이유만큼은 쉽게 짐작하지 못했다. 한두 번이었으면 집에 급한 일이 있거나 급한 연락이 왔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어느날부터 갑자기,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랬다. 그 말인즉슨 평소보다 유이와 있던 시간이 짧아졌다는 것이다. 헤어지기 전 집 앞을 뺑뺑 돌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 나누다가 집에 바래다주는 게 소소한 행복이었는데, 유이의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 시작된 후부터는 그런 행복을 잃었다는 것이다. 물론 데이트하는 시간이나, 학교에서 보는 시간도 충분히 좋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을 뺏긴 것만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츠야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해 줄 때가 오면 그녀가 꼭 이야기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일의 빈도가 잦아질수록, 그 기간동안 유이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자 미츠야에게 참을 수 없는 의문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또다시 중간부터 홀로 집에 가려던 유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속에 쌓여있던 질문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유이. 무슨 일 있어? 요즘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혹시 말하기 곤란한 일일까 봐 먼저 말을 안 꺼냈는데, 조금 걱정이 되는 거 있지. 물론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한눈에 봐도 걱정으로 복잡한 미츠야의 표정에 유이가 고민하다가 꾹 다문 입을 열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건지 우물쭈물 속으로 단어를 고르다가, 결심이 서기라도 한 건지 비장한 눈빛으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느린 호흡으로 나오기 시작한 말은 약간의 미안함과 쑥스러움이 미묘하게 혼합된 형태였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게, 큰일은 아니고… 그냥 얼마 전에 데이트했을 때, 그날 부모님이 어디 가냐고 하셔서 데이트 간다고 했거든…. 뭐 죄짓는 것도 아니고, 데이트 가는 게 사실이니까 그냥 그대로 말한 건데 그날 이후로 부모님이 자꾸 미츠야 데리고 놀러 오라고 하시는 거 있지. 근처에서 마주치면 분명 들어오라고 하실 테고… 그러면 미츠야가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괜히 걱정시킬 줄 알았으면 미리 말할걸!”
    
말하면서도 약간 울상을 짓는 유이에 미츠야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사정이었지만, 그래도 알게 되니까 속 한구석이 시원했다. 무엇보다 미츠야는 자신을 생각해 준 그녀의 마음에 고맙기도 하고 그 배려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차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유이는 그에게 과분할 정도로 다정했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모르는 채로, 미츠야가 유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한결 홀가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난 괜찮아, 유이. 그러고는 스스로가 뱉은 말이 모호하다고 생각했는지 덧붙인다. 나도 언제 한번 뵙고 싶어. 딸의 남자친구를 궁금해하시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부모님께 시간 괜찮으신 날에 한번 뵙고 싶다고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그 말에 유이의 얼굴이 다시 한번 미안함 반, 고마움 반으로 가득 차오른다. 하지만 입으로는 곧바로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응, 알겠어! 부모님이 엄청 좋아하실 거야. 오늘 말씀드려 볼게!”
    
그러고는 비장한 얼굴로 집에 들어가야겠다며 맞잡은 손을 조심스레 떼어낸다. 약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들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미츠야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꼭 좋은 인상을 남겨서, 안심하실 수 있도록 하자. 그녀의 남자친구가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이렇게 일찍 헤어지게 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물론 언제 헤어진다고 한들 아쉬운 감정은 항상 변하지 않았지만. 미츠야는 한참을 그곳에 가만히 서 있다가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바로 말씀드리겠다는 말이 진심이었던 건지, 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연락이 왔다. 날짜는 이번 주 토요일, 멀지 않은 날이었다.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차라리 다행인 편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매는 먼저 맞는 게 나으니까…. 미츠야는 토요일에 괜찮냐고 물어보는 유이의 문자에 엄지손가락으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좋아. 그러자 바로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와서, 미츠야는 작게 웃으며 문자를 보관함에 저장했다. 이제 문제는 토요일에 어떻게 잘 보이느냐였다. 그가 옅은 호흡을 내뱉었다. 부담이 되는 건 아니지만, 유이의 부모님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조건 잘 보여서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는 게 최고의 상황이다. 그는 토요일을 기다리는 건지,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마음으로 한 주를 보냈다.
    
내내 토요일의 약속을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 오랜 고민 끝에 나오는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여자친구의 부모님께 잘 보이는 방법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무조건 예의 바르게 대한다 같은 당연한 사회적 통념에 해당하는 사실 뿐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라서 아무리 고민해도 그냥 있는 만큼만 하고 오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기에 미츠야는 할 수 있는 선에서 열심히 하자는 마음으로, 옷장을 뒤져서 단정한 옷을 찾아 입었다. 비교적 단정하고 깔끔한 옷은 특공복이나 편한 옷, 교복에 깔려 있었기에 꽤 깊숙한 곳에서 꺼내야 했다. 데이트할 때도 차려입는 편이었지만, 이번 약속은 엄밀히 따지자면 데이트가 아니었기에 조금 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을 뵙는 자리인데 오토바이를 타고 갈 수는 없어서, 그는 현관문을 열어 익숙한 길을 쭉 걸어갔다. 항상 유이와 함께 걷는 길이라 혼자 걷고 있는 지금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그 어색함을 깊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새하얀 운동화가 성큼성큼 지체없이 앞으로 나아가더니, 평소에는 삼십 분씩 걸리던 길을 십 분 만에 지나왔기 때문이었다. 유이와 걸을 때는 정말 있는 대로 시간을 끌면서 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미츠야는 괜히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기본 삼십 분, 오래 걸리면 한 시간도 걸리는 길이라서 조금 일찍 출발했는데 그게 무색하게도 약속 시간보다 사십 분이나 이르게 도착해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잠시 유이의 집 앞을 서성거리던 미츠야가 휴대폰을 꺼냈다. 유이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 한 건이 화면에 떠 있었다.
    
“여보세요? 유이? 무슨 일이야?”
[“아, 미츠야! 별건 아니고, 그냥 언제쯤 출발할 건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그는 잠시 지금 집 앞이라고 사실대로 말할지, 아니면 곧 출발할 거라고 거짓말을 할지 고민했다. 너무 일찍 도착한 게 오히려 실례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그냥 주변에서 기다리다가 약속 시간이 되기 십 분 전에 도착했다고 연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반사적으로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과 정반대인 말이었다. 아, 나 사실 이미 도착… 했는데.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상대의 놀란 목소리가 들린다. 벌써? 그럼 집 앞에 있는 거야?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튀어나온 말에 당혹스러우나 이미 내뱉은 말을 주울 수는 없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긍정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분주한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열리며 유이가 뛰쳐나왔다.
    
“미츠야! 빨리 도착했네!”
    
생기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자, 미츠야는 벌써부터 우주에 부유하고 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건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분명 두 발은 땅을 밟고 있는데 몸은 허공에 붕 떠서는 온몸으로 공기를 갈라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는 부유감을 떨치기 위해 유이의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발이 땅에서 떨어질 때마다 우주 역시 그의 머리 한구석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들뜬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미츠야가 어느새 끝을 모르고 하늘을 향해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를 손끝으로 꾹꾹 눌러 가라앉히며 대꾸했다. 조금 일찍 출발하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나도 몰랐어. 그러고는 괜히 걱정이 돼서 덧붙인다. 너무 일찍 도착했나? 실례일까? 그러나 그런 걱정을 유이는 고갯짓 몇 번으로 흩어지게 만들고는 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실례는 무슨! 그렇게 이른 것도 아닌데 뭐. 자, 빨리 들어와! 엄마랑 아빠가 엄청 좋아하실 거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유이가 대문에서 현관까지 그의 손을 잡고는 집 안으로 안내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긴장이 손끝을 차갑게 만들었지만 집의 분위기가 유이를 닮아서 그런 건지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밝고 따스한 느낌의 인테리어는 포근한 느낌을 주었고, 그와 동시에 마음 한구석을 편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미츠야는 짧은 복도에 붙어있는 그녀의 사진을 하나하나 살피며 유이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알지 못하는 유이가 이곳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딘가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식사 준비했는데, 뭐 먹고 오진 않았지? 우리 부모님이 엄청 많이 준비해서 각오해야 할걸? 아, 나도 같이 준비했어!”
“많이 먹어야겠네. 나 기대해도 되는 거야?”
    
그가 웃으며 대꾸하자 유이가 아무 대꾸 없이 빙그레 웃으며 부엌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누군가를 소개하는 것처럼 부엌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짜잔! 여기가 우리 집 부엌이야. 부엌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부엌 한가운데에 있는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많이 준비했다는 말이 진심이었던 것인지, 식탁에는 빈 공간 하나 없이 빼곡하게 접시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의자에는 유이의 부모님인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앉아서 흐뭇하게 웃으며 유이와 미츠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츠야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허리를 푹 숙이고는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미츠야 타카시라고 합니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긴장하고 있었던 건지, 버썩 마른 입술 사이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미츠야는 다행히도 목소리가 볼 폼 없이 떨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렇게 만나니까 감회가 새롭네, 미츠야군.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유이가 어찌나 자주 이야기를 하던지!”
“엄마…! 그런 걸 이야기하면 어떡해!”
    
웃음기 어린 말에 유이가 부끄러운 건지 빨개진 얼굴을 가리며 외쳤다. 그 모습이 그저 귀여워 보이는 건지, 그녀의 모친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저 말을 이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미츠야는 그 장난스러운 모습이 어쩐지 유이랑 닮아서, 긴장을 풀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식탁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하던 음식은 천천히 비어가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어색하던 공기도 점점 풀어졌다. 식사가 시작할 무렵만 해도 다시 긴장하던 미츠야는 너무나도 익숙한 분위기와 대화 방식에 차마 긴장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유이의 버릇과 성격, 여러 면모가 누구를 닮은 건지 알게 되는 과정이 꽤나 재밌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식사 시간은 영원이랑 거리가 먼 단어였기에, 정해진 시련과도 같은 질문과 함께 미츠야의 평화가 깨졌다.
    
“유이랑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되려나?”
    
유이와의 첫 만남. 물론 생생하게 떠올랐고, 그때 느낀 감정부터 상황까지 전부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유이의 부모님께 자신이 불량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제 입으로 말하느냐였다. 딸의 남자친구가 불량배? 보통의 사람이라면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사실이라는 것 정도는 미츠야도 잘 알고 있었다. 말한 순간 좋지 못한 인식이 박힌다는 것도, 최악의 경우 그들의 사이를 반대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쿄 만지회를 부끄럽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불량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나쁘다는 걸 아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이 세계에 오랫동안 몸을 담았고 살아왔다. 그의 친구들은 특공복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며 낭만을 등에 이고 도로를 달렸고, 그러한 낭만과 우정으로 이루어진 도쿄 만지회를 좋아했다. 그렇기에 미츠야는 차마 그가 좋아하는 것을 제 입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 그게….”
    
하지만 결심을 해도 여전히 대답은 말꼬리를 늘이기만 할 뿐,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말 한 마디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내뱉기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일까? 고작 몇 단어를 이야기하는 것도 어째서인지 주저하게 됐다. 아마도 식탁 아래로 그의 손을 붙잡아 온기를 전하는 유이만 아니었어도 차마 말을 전부 끝내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미츠야는 손을 뒤덮는 따듯하고 말랑한 촉감에 반사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이가 말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행동이 마치 말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라는 의미처럼 느껴져서, 그는 이어지지 못하던 말꼬리를 천천히 이어 나갔다.
    
어쩌다가 유이를 만나게 된 건지, 그날 그녀를 본 순간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후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유이도 다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거침없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말하기 전까지만 해도 속이 그저 갑갑했는데 이야기를 할 수록 홀가분하니 기분이 개운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 어떤 꾸중도 입에 담지 않았고,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간간이 대꾸해 주는 게 반응의 전부였다. 여타 어른들처럼 불량의 세계 같은 건 우스운 꿈일 뿐이고 불량집단에 가입하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는 유이에게 고백하던 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유이가 정말 부모님과 닮았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녀 역시 불량을 멸시하지 않았다. 유이는 언제나 그가 걷는 모든 길을 응원했고, 가끔은 그의 길을 함께 걸어주기도 했다. 물론 치후유 덕분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친구와 남자친구라는 두 관계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유이는 그저 미츠야라는 사람을 믿고, 그와 동시에 그의 친구들과 그가 선택한 집단의 정의를 믿고 응원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모든 걸 부모님께 배운 거였구나.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미츠야는 괜스레 말을 잇다가도 뒷목을 쓸어내렸다. 심장이 기이한 속도로 박동하는 게 첫 만남 때를 회상하다가 그때의 기분이 옮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가 좋아하는 유이의 모습이 어떤 곳에서 기인된 건지 알게 된 탓인지 헷갈렸다. 둘 다인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유이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의 모친이 탄성을 질렀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처럼, 잔뜩 신나서는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리액션이 격한 나머지 미츠야는 조금 당황하기까지 했다.
    
“어머, 그러면 우리 유이한테 첫눈에 반한 거네?”
“우리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유이가 좀 예쁘긴 해. 우리 애들이 예쁜 건 다 당신 닮아서 그런 거지~ 안 그래?”
“으이구. 입바른 말 하기는! 주책이야. 그보다 미츠야 군, 사귀기로 한 건 언제부터야?”
    
유이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건지, 한 번 그들의 연애 이야기가 트이자 그녀의 부모님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고백은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한 건지, 서로의 어느 부분이 좋은 건지, 데이트로 뭘 하는지. 미츠야와 유이는 그 질문에 하나하나 다 답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앉아있었다. 결국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진 대화는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서 집에 갈 때가 되고 나서야 마무리될 수 있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드리고 또 놀러 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미츠야는 배웅을 해주기 위해 대문 앞으로 나온 그녀의 부모님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 겸 인사를 드리고는 유이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바래다주는 건 주로 그의 역할이었지만, 간혹가다가 유이의 역할이 될 때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유이는 부모님이 말이 많으신 편이라 너무 귀찮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며 머쓱한 기색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미츠야는 그런 화목한 분위기가 좋았어서, 한사코 부정하며 정말 재밌었다고 대꾸했다. 솔직히 그런 식으로 분위기를 주도해 주지 않았다면 침묵과 적막으로 가득 찬 식사가 됐을 게 분명했다.
    
“저기 유이, 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그렇게 느릿한 걸음을 옮기며 대화를 나누던 도중, 미츠야는 식사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의문을 조심스럽게 유이에게 이야기했다. 그가 양키라는 것을 이야기했지만 별 동요가 없었던 점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안 좋게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유이가 미리 말해둔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편인 건지.
    
“내가 도만 소속이라는 거 들으셨을 때 엄청 태연하시던데…. 어떻게 된 거야? 혹시 알고 계셨어?”
“아, 도만 소속이라는 건 내가 미리 말해뒀어. 우리 부모님은 치후유의 경우도 있고 해서, 그런 거에 편견 없으시니까 말해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혹시 내가 마음대로 말해버려서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해. 나쁜 의도는 없었어…!”
“아니, 기분 안 나빴어. 오히려 따로 설명해 드리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해야 하나…. 편하기도 했고, 혹시 안 좋게 보실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아, 그리고 오늘 정말 재밌어서 좋았어.”
    
그러고는 조금 고민하다가 덧붙인다. 식사도 엄청 맛있었고, 대화도 리액션을 잘해주셔서 그런가? 되게 즐거웠어. 너랑 닮은 부분 찾는 것도 재밌었고. 무엇보다 네 어릴 때 사진을 볼 수 있어서 진짜 좋았어. 유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며 이야기하자 그녀가 잔뜩 신나서는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품었다. 응, 재밌었다니 다행이네! 말간 얼굴에는 칭찬에 대한 쑥스러움도 약간 묻어났다. 미츠야가 온다는 소식에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봐 잔뜩 긴장하며 오늘 하루를 보냈기 때문에 그의 말이 더더욱 뿌듯하고, 그와 동시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유이에게는 부모님도 미츠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관계였기에, 혹시라도 좋지 않은 인상이 박히기라도 할까 봐 내내 긴장에 곤두선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하다는 것 정도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세상이 예상대로 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만약을 대비한다고 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무사히 첫 만남을 마친 유이는 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재밌었다니 다행이네! 음식도 완전 열심히 준비했는데 맛있었다니… 옆에서 도운 보람이 있는걸?”
    
그러다가 잠시 우물쭈물 말을 고르더니 조심스러운 말투로 덧붙인다. 어쩌면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한 모양새였다. 눈동자를 굴려 힐끔힐끔 바라보며 미츠야를 훑던 유이가 검지 손가락으로 볼을 살살 긁었다.
    
“저기, 미츠야. 나도 다음에 너희 집에 놀러 가서 인사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
    
미츠야는 눈을 깜빡거리며 유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유이가 빨간 얼굴을 손등으로 괜스레 문지르다가 미소를 지었다. 인사드리고 싶어서! 어느새 도착한 미츠야의 집 앞에서 유이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있지, 미츠야한테 많이 고마워. 오늘 부모님이 정말 즐거워하셨고… 나도 재밌었어. 요즘 바빠서 자주 대화도 못하고 많이 서운해하셨거든. 그 말에 미츠야도 다정하게 손을 맞잡으며 대꾸했다. 나도 늘 유이한테 고마워. 오늘 초대도, 배려해 준 것도. 네가 아까 손 잡아준 덕분에 긴장하지 않고 말할 수 있었어. 그리고 우리 엄마한테… 말씀드려 볼게. 아마 좋아하실 거야. 루나랑 마나도 유이를 좋아하니까 환영해 줄 거고. 이어진 말이 조곤조곤 밤을 가득 채운다. 어느새 하늘에는 총총히 별이 박혀서는 눈동자를 빛으로 물들여서, 유이는 홀린 듯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되는 날짜… 오늘 연락해서 알려줄게.”
“응! … 조금 뜬금없는데, 약간 상견례 하는 것 같아. 으음, 이렇게 생각하니까 뭔가 미츠야의 어머니를 뵙게 되면 엄청 긴장할 것 같은 거 있지. 막상 내가 이 상황에 처하니까 아까 네가 긴장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긴장되지. 그래도 너라면 엄청 좋아하실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와도 돼. 아마도 주말일 테니까 간단히 밥 먹는다고 생각하고. 나 은근히 요리 잘해. 기대해도 좋아.”
    
그러고는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다가 귀 뒤로 넘겨주고는 이야기한다. 시간이 더 늦기 전에 들어가야지, 유이. 아쉬운 표정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자 미츠야.”
“잘자, 유이.”
    
미츠야가 집으로 들어가고 현관문이 닫히는 것까지 본 유이가 몸을 돌렸다. 환한 가로등 아래에서 유이는 홀로 존재했다. 이 길, 이렇게 외롭게 생겼던가. 항상 미츠야와 함께 하던 길이라서 그런지 혼자인 지금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유이는 내일이, 또 만날 날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발걸음을 떼어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8093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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