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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만남

by mitsuyui 2022. 12. 4.

(뫄님 cm)

일본은 저녁이 되면 분위기가 스산해진다. 가로등 대신 나무가 울창하게 늘어진 길이라면 더더욱. 음기가 짙게 깔리고 땅거미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하며 고요하면서도 기이한 분위기가 곳곳에 머문다. 웬만한 사람은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설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곳은 공포심을 자아냈다.

유이는 잠시 그 어두운 길을 바라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풀벌레가 우는 소리, 나뭇잎을 헤치고 무언가가 달려가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평소라면 꺼림칙한 마음에 괜히 돌아서 갔겠지만, 오늘만큼은 이 길로 가고 싶었다. 가느다란 한숨이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다. 가방에 들어있는 문제집 때문에 어깨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오랫동안 앉아서 공부한 탓에 온몸이 휴식을 바랐다. 그러나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무렇게나 쉴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유이의 앞에 있는 길은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다. 잠시 갈등하던 갈색 눈동자가 마침내 결론을 낸 건지, 결연한 빛을 띠었다.

새하얀 운동화가 마른 흙을 밟았다. 고작 어둡다는 이유로 지름길을 포기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그리 여의찮았다. 시험 기간이라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학교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에 유이의 몸은 절실히 집을 원했다. 아니, 어쩌면 마음도. 당장 집에 들어가서 침대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어둠에 대한 공포심보다 훨씬 컸기에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지름길의 절반 가까이 걸었을 때였다. 밤에는 사람들이 잘 안 오는 길이라 말소리가 들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유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먼 곳에서 소리를 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할 말들이 웅웅거리며 길에 울려 퍼졌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귀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심스럽게 내디딘 걸음이 목소리의 근원지로 향할수록 그런 생각과 정체 모를 것을 향한 두려움은 잦아들었다. 지름길 한가운데에는 가끔 도쿄 만지회의 집회가 열린다는 무사시 신사가 위치해있다는 사실이 문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 불량함이 잔뜩 묻어있는 목소리의 근원지가 무사시 신사라면 아마도 이 목소리의 주인은 도쿄 만지회 소속의 대원일 것이다. 어쩌면 대장일 수도 있고. 목소리의 근원지를 깨닫기 전까지만 해도 까맣게 잊고 있던 친구의 문자가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집회가 있으니 공부 후에 집에 들어갈 거면 지름길이 아닌 길로 가라고 신신당부를 전하던 문자. 번쩍이는 휴대전화기에 딱딱한 글씨로 써진 내용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유이는 한숨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맙소사. 그걸 잊고 있었네. 본의 아니게 그녀의 친구이자 도쿄 만지회 소속인 치후유가 남긴 걱정스러운 당부를 무시해버린 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도 많이 와서 집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녀는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그런 생각 때문에 차마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유이가 가방을 고쳐 맸다. 신사 앞에는 여러 대의 바이크와 세간에서 불량하다고 칭하는 복장을 한 이들이 욕설 섞인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걸 어쩌지. 가, 말아? 작은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치후유의 경고 때문에 이왕이면 마주치지 않고 싶다. 아무리 치후유가 속한 단체라고 해도 도쿄 만지회는 불량아가 모인 곳이었고, 불량아라는 존재는 그리 만만하게 볼 것은 아니었다.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부터 그녀가 불리했다. 그녀는 한평생 주먹질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고, 혹시라도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진학할 때 불리해질까 봐 싸움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량아는 약간 달랐다. 이미 싸움을 경험해본 이들이 대다수이고 학교 성적이나 부 활동보다는 본인의 신념을 추구했다. 물론 일반화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유이가 본 불량아들은 그러했다. 역시 돌아서 가야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열심히 걸어온 길을 떠올리니 유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래, 이성적으로 봤을 때 돌아서 가는 게 낫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공부에 지친 그녀의 몸은 그걸 바라지 않았다. 겨우겨우 움직여 여기까지 온 다리를 잠시 동정 어린 눈동자로 바라본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다리야,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요, 하고 다리가 외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높은 확률로 머릿속에서 멋대로 만들어낸 목소리일 게 분명했지만 그녀는 이 가련한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유이가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기를 바랐다. 피곤한 몸도, 선택에 기로에 놓여있는 그녀의 상황도. 그러나 유이가 앞두고 있는 건 명백한 현실이었다. 코끝에 닿아오는 찬바람이 그것을 증명했다.

“저길 건너거나 내 다리를 혹사하거나. 둘 중 하나인 거지?”

그녀의 목소리가 믿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잘게 떨렸다. 무엇하나 나은 선택지가 없었다. 백 퍼센트의 확률로 다리를 포기하거나 오십 퍼센트의 확률로 신변을 포기하거나. 가히 절망적이라 할 수 있는 상황에 유이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둘 다 끌리지 않았다. 그래, 한쪽을 선택하기란 원래 어려운 법이었다. 특히 장점과 단점이 확실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데 진중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니 끝이 나지 않는다. 유이는 터질 뻔한 한숨을 애써 삼키고는 새카만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총총 박혀있는 하늘은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별이 뜰 정도로 늦은 시간에 돌아가는 학생의 비애란.

“차라리 여기까지 오기 전에 떠올렸으면 좋았을 텐데.”

고작 집에 가는 길에 대한, 별로 대단하지 않은 고민인데도 불구하고 결론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하지만 유이는 자신이 이 정도로 갈등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무언의 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본래라면 조금 힘들어도 돌아가기를 택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계속해서 갈등하고 있었다. 돌아서 갈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집으로 향할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평소대로 할 거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걸리면 위험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걸렸을 때의 일이었다. 그러니 조용하고 빠르게 지나가면 별문제 없지 않을까.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그런 안일한, 혹은 자기합리화 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녀가 불량의 일색인 공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치후유, 미안.”

당사자에게 닿지 않을 사과를 내뱉고는 유이가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괜히 불안감에 쿵쾅거리던 심장이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래, 치후유가 말해준 도쿄 만지회는 다정했다. 물론 불량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가 어울리는 사람들의 심성이 잔악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치후유처럼 겉만 불량하고 속은 제법 따듯한, 그런 이들이 아닐까. 그래,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조심만 하면.

불량아 사이를 걸어가기란 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지만 유이는 건들거리며 욕설을 내뱉는 이들을 전부 치후유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저건 치후유다. 내 친구 치후유다. 무섭지 않다. 물론 그들이 진짜 치후유인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의 진정을 끌어낼 수는 있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치후유다. 내 친구 마츠노 치후유다. 속으로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숨을 잔뜩 죽이고 유심히 바라보지 않으면 안 보일 정도로 몸을 움츠린다. 길에 있는 가로등은 전부 약한 빛만을 내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녀의 존재를 모를 것이다. 실제로도 유이의 쪽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안심 어린 숨을 내뱉을 때, 누군가가 유이의 손목을 잡아챘다.

“겁도 없이 여길 지나가려고?”
“흡.”

긴장으로 인해서 흔들리는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시 앞을 향했다. 유이는 당장 이 자리를 빠르게 벗어나고 싶었다.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치후유에게 들키게 됐을 때의 상황도 꺼려졌고, 그녀의 손목을 잡은 이도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조금 전에 ‘도쿄 만지회 사람들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 우습게도 그녀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치후유 같은 성격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유이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긴장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없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빨리 걸어갈걸.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니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남자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유이를 잠시 바라보던 그가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그러고는 해치지 않을 거라는 듯이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약간 흔들기까지 했다. 유이는 그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았다.

“미안. 겁줄 생각은 없었어. 여기로 지나가는 건 그리 좋은 생각 같지 않아서 말이야. 돌아서 다른 길로 가는 게 나을 거야.”

친절한 목소리였지만 유이는 그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고민하느라 기력을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이제는 정말 돌아갈 체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귀찮기도 했고. 이미 여기까지 왔고, 결심까지 하면서 이 길을 밟았는데 다시 돌아가라니.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난처한 표정을 한 유이가 긴장이 조금 가신 얼굴로 대꾸했다.

“어, 말은 감사하지만, 집에 빨리 돌아가야 해서요! 피곤해서 빨리 쉬고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쪽이 지름길이거든요. 무엇보다 벌써 반이나 왔는데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귀찮, 아니…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은 것도 있고.”

그러고는 유이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가끔 본 적 있는 특공복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불량임이 분명한 차림새. 심지어 한쪽 귀에는 커다란 귀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불량아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외관과는 다르게 그는 조심스러웠다. 내뱉은 말은 그녀를 위한 충고였고, 약간의 걱정이 담겨있었다. 알고 있는 불량의 이미지하고는 상당히 동떨어진 성격을 가진 이였다. 유이는 잠시 그의 얼굴을 살폈다. 눈썹의 스크래치가 조금 독특하지만 그런 독특함을 소화해낼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좋지 못한 습관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유이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싸움은 무슨,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유순하게 생겼다. 어디까지나 차림새를 제외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저기?”

유이가 별다른 행동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의아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침묵하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저도 모르게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 분명했다. 원래는 이렇게 정신없이 구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따라 이런저런 실수가 잦았다. 유이가 곤란한 얼굴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그녀의 대꾸를 기다리는 이를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저, 마츠노 치후유라고, 금발 남자아이가 여기 소속되어 있는데… 아세요? 그 애가 제 친구라서, 혹시 괜찮으시면 치후유 좀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불러줄게.”

유이의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그가 지나가던 이를 붙잡았다. 금발. 얼굴에 커다란 흉터를 달고 있는 이가 험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소년과 눈을 마주하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미츠야 군! 그 놀란 외침 덕분에 유이는 소년의 이름이 미츠야라는 것과 제법 높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츠야는 치후유를 데리고 와달라며, 그에게 유이가 부탁한 내용을 꺼냈다. 치후유를 알고 있는 건지 부탁을 받은 금발 소년은 아, 치후유요? 라고 되묻고는 어느 한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유이가 눈으로 그의 뒤를 좇았다. 금색 머리카락의 향연. 도쿄 만지회의 조건은 금발인 건지, 눈에 들어오는 이는 죄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소수의 이들을 제외하고는.

소년이 무리에 끼어들어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는 금색 머리카락이 모여있는 무리에서 익숙한 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치후유. 그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유이의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잔소리를 쏟아낼 것만 같은 얼굴에 그녀의 얼굴빛도 흐려졌다. 그래, 치후유를 불러달라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 정도의 일은 예상하고 있었다. 치후유가 분명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온 거니까, 걱정어린 잔소리를 쏟아내겠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잔소리를 내뱉는 치후유를 상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팠다. 나름 억울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더욱 그러했다.

“누나!”

잠시 머뭇거리던 유이가 손을 번쩍 들어서 살살 흔들며 대꾸했다. 치후유!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왔어. 아까 알겠다고 대답하지 않았어? 위험할 수도 있다니까! 문자를 확인했으면 제대로 기억해야지, 이 바보.”
“미안! 종일 바빠서 잊고 있었지 뭐야? 반절 정도 온 후에야 기억이 났어.”
“정말… 다음부터는 절대 잊지 마. 일단 데려다줄게. 아직 집회가 시작하려면 시간이 꽤 남았으니까. 애초에 오늘 집회 외에도 이 길은 어둡고 위험하니까 되도록은 다니지 마. 큰길로 다니는 게 여러모로 좋잖아.”
“알겠어, 알겠다니까. 걱정하지 마! 앞으로는 이럴 일 없을 거야.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빨리 집 가려고 이쪽으로 온 것뿐이니까. 학교에서 체력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돌아서 갈 힘이 없었단 말이야. 너도 매일 이쪽으로 다니면서 자꾸 나한테만 잔소리야. 다음부터는 큰길로 갈게, 잔소리쟁이 치후유!”

치후유의 말에 대꾸하며, 유이가 비실비실 웃었다. 그래, 뭐. 잔소리는 싫지만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이 기회에 같이 하교하는 기분도 내고 그러는 거지. 하던 말을 멈추고 바이크를 가지고 오겠다는 치후유를 보낸 그녀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앞으로는 웬만하면 이쪽으로 오지 말아야겠네. 두 번 오면 치후유가 아주 기겁하겠는걸.

“유이 누나, 뭐해! 빨리 가자!”
“기다려. 그쪽으로 갈게!”

어느새 바이크를 끌고 온 치후유가 그녀를 부르자 환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역시 친구 하나는 참 잘 사귀었어. 그런 생각에 괜히 기분이 들떠서 치후유 쪽으로 향하다가 문뜩 생각난 사실에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살짝 돌아보니 미츠야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온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괜스레 짧은 머리카락은 눈에 담아보고는 천천히 내려와서 눈, 코, 입을 차례대로 훑어본다. 그러고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보이는 검은색 특공복까지. 그가 보여준 상냥한 모습 때문인지, 양키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특공복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입가에 미소를 피워내며 유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고맙습니다!”

미츠야는 유이를 도와줬다. 큰 도움은 아니었다. 위기 상황에서 멋지게 구해준 것도, 곤란한 일에 발 벗고 나서준 것도, 심지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지, 유이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기에 그 호의를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본 태도가 그의 심성을 짐작하게끔 만들었고, 그가 유이에게 말을 건 이유에 걱정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기에. 별로 상관없는 사람인데다가 내버려 둔다고 해서 그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는 기꺼이 도왔다. 그런 도움마저 주지 않는 사람이 널리고 널린 세상에서 미츠야는 거리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이는 미츠야가 다정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감사를 느꼈다. 그가 내민 걱정과 충고가 싫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집에 잘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치후유 불러주신 것도 감사해요!”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니 다행이네. 여러모로 위험한 길이니까, 네 말대로 시간이 늦은 것도 있고.”

미츠야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치후유와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유이를 잠시 번갈아서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여태껏 보여준 다정한 면모와는 다르게 그 나이대의 장난스러움이 잔뜩 묻어나오는 미소였다. 그러나 햇볕 아래에 있는 것처럼 따스한 느낌을 받게 되는 건 여전했다. 서늘한 밤과는 동떨어진 웃음에 유이는 괜스레 쑥스러웠다. 좋은 사람도 많구나, 불량 중에도. 하긴 치후유도 좋은 애지.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마냥 편견을 가지고 생각한 것처럼 느껴졌다. 특공복을 입고 있다고 해서 전부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녀는 잠시 할 말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런 유이를 미츠야는 기다려주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내뱉을지 고민하는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으며.

“그래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에 신경을 써주신 거잖아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유이가 웃었다. 주변이 밝아지는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환한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만연히 피어올랐다. 눈은 부드럽게 휘어지고 조금 쑥스럽다는 티가 묻어나왔다. 때가 존재하지 않아서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순수한 웃음이었다. 미츠야는 그 웃음에서 눈을 떼어낼 수 없다고, 문뜩 그렇게 생각했다. 유이의 웃음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고, 사람의 호감을 끌어내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본인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타인에게 그러한 영향을 미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런 웃음을 계속 볼 수 있다면 이까짓 도움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버릴 정도로 맑았다.

미츠야는 잠시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조금 멍했던 것 같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빼앗겨서, 주변 살필 것 없이 유이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었으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던 미츠야는 치후유가 유이의 이름을 크게 한 번 부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정신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부끄러움에 괜히 마른세수를 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좋아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상당히 바쁜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을 챙기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좋아할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연애니, 뭐니 하는 부분에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눈치가 빠른 것과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이 상황에 대해서는 연애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 미츠야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이 마치 좋아하는 감정을 처음 자각한 소년처럼 굴고 있었으니까. 하루에도 수십 번 이상 볼 미소에 눈을 못 떼고 부끄럽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는 참을 수 없는 쑥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유이의 미소는 사랑스러웠다. 마치 마약이나 도박에 중독되는 것처럼 보면 볼수록 더 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시간이 멈추기를 바란다고 해도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 시간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유이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더니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유이의 잔상에 젖어 눈을 깜빡이는 미츠야와 그녀의 뒷모습.

미츠야는 멍한 정신을 애써 깨웠다. 그러고는 치후유의 바이크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유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손을 들어 흔들었고, 미츠야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손 흔드는 동작에 웃음이 나오는 까닭은 그녀에게 호감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재밌다. 그는 유이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길에 우뚝 멈춰서서는 홀로 중얼거리던 모습.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는 게 재밌기도 하고, 흥미가 생겨서 말을 걸었다. 집회에 일반인이 말려드는 걸 바라지 않은 탓도 있었다. 하지만 유이의 티 없이 맑은 웃음을 마주한 순간, 미츠야는 난생처음으로 남의 인생에 끼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고,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어쨌든 미츠야는 유이의 존재가 기꺼웠다. 그러나 아는 것이라고는 유이,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뿐. 아니, 이마저도 애칭일 수 있었기에 아는 것이 전무하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결국 미츠야는 유이를 바래다주고 온 치후유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기회를 노려 말을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고, 그녀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치후유가 유일했으니까.

집회가 끝나고 자신을 붙잡는 미츠야에 치후유가 의문을 표했다. 자신을 왜 붙잡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눈을 깜빡거리면서. 그런 치후유의 모습에 미츠야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내뱉기 시작했다.

“아까 그 애, 이름이 뭐야?”

유이에 대해서 묻는 미츠야에 치후유의 얼굴에 경계가 서렸다. 아마도 본인은 티가 안 난다고 생각하겠지만, 미츠야는 치후유가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건 왜….”

미츠야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고, 결국 단순한 결론을 이야기해줄 수밖에 없었다.

“음, 친해지고 싶어서.”

치후유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는 듯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결국은 미츠야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미츠야는 불량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도쿄 만지회에서 가장 성실하고 바른 사람이기도 했다. 도쿄 만지회는 여자를 건들지 않았고, 미츠야 역시 여자나 일반인은 건들지 않았다. 그러니 유이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치후유는 길게 이어진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아키바 유이, 미츠야 군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어, 동갑이고요. 아무리 미츠야 군이라고 해도 누나를 상처입히면 용서하지 않을 검다!”
“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알려줘서 고마워.”

미츠야는 잠시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키바 유이. 본인하고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츠야는 치후유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한 후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설렘인지 긴장인지 모를 감정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8,192자)

미츠유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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