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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낭만,

by mitsuyui 2023. 1. 15.

(뫄님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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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실의 분위기는 언제나 조용하면서도 묘하게 활기찬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따로 제출하거나 질문하고 싶은 내용이 있는 게 아니면 교무실에 방문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서로의 사생활을 지키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다행스럽게도 교무실의 분위기는 안락하고 쾌적하며, 가끔은 유쾌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다를 이유는 하나도 없었고, 각자의 일에 치중하면서도 간식을 나누어 먹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교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어도 아마 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귤을 나눠 먹고 있었을 것이다.

귤을 돌리던 손을 멈추게 한 노크 소리의 주인은 미츠야였다. 동아리 담당 교사가 자신을 호출했다는 말을 부원을 통해서 전해 들은 그가 점심 식사 후 교무실로 내려온 것이었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그가 수예부 담당 교사를 향해 걸어갔다. 교무실은 미츠야의 등장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아서 그대로 얼어붙은지 오래. 간식을 주고받던 손길을 거두고 검은색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던 이들이 힐끔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가 도쿄 만지회 소속이라는 것이 교사들 사이에서도 알음알음 퍼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소문이 나는 게 당연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이곳에는 그의 휘하 대원들도 여럿 존재했고, 삼 번대 대장과 부대장도 다니고 있으니 그들과 미츠야가 대화하는 모습을 본 학교 사람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안다고 해도 미츠야가 말썽을 피우거나 애 먼 학생들을 괴롭히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생활에는 지장이 없었다. 가끔 이런 식의 묘한 반응이 존재하긴 하나, 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 미츠야.”
“선생님. 부르셨다고 들어서….”

눈썹의 스크래치와 삐죽삐죽한 머리카락이 다소 불량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츠야는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그가 불량아인 것도, 도쿄 만지회 소속인 것도 틀리지는 않았지만, 본인의 입으로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와 남의 입방아에 휘말렸을 때의 기분은 천지차이였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남에 의해서 멋대로 정의되는 것은 불쾌하다. 그렇기에 미츠야는 학교 내에서 불량이라는 프레임으로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고, 그러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모범적으로 구는 것이었다. 최소한 학교 내에서는. 아니, 적어도 어른 앞에서는 그렇게 해야 했다.

동그란 안경을 걸치고는 잠시 그를 바라보던 동아리 담당 교사가 서랍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웬 열쇠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가 입을 열고는 설명을 내뱉었다. 새로 배정받은 동아리실의 열쇠라는 말과 함께 잃어버리지 말라는 이야기가 따라나온다. 미츠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열쇠를 받아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손끝을 통해서 느껴졌다. 용건이 끝났으니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그가 몸을 돌려서 걸어나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문뜩 생각난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번 집회에서 만난 아키바 유이. 치후유의 소꿉친구이자 소중한 사람. 그는 그때 만난 아키바 유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감정이었다. 조금 어색하지만 이건 호감이라고 정의하는 게 맞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날 미츠야는 치후유에게서 유이가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넓은 학교 내에서 그녀를 찾기란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다른 반을 쭉 훑어보아도 유이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보기에는 좀 꺼려졌다. 고작 아키바 유이라는 애가 있는지 묻는 행동 하나만으로도 소문이 만들어지는 곳이 학교이기 때문이었다. 괜히 유이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었고, 엄한 이야기가 나돌아다닐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교무실은 좀 달랐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이는 제법 관대하고 자유로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유이에 대해서 물어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면 기꺼이 대답해줄 것이다. 그렇기에 미츠야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아키바 유이가 몇 반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키바? 아키바는 왜?”
“돌려줘야 하는 물건이 있는데 막상 몇 반인지 모르고 있더라고요.”
“글쎄… 우리 학년이 아니라서, 나도 반까지는 모르고 아마 매일 도서실에 있으니까 그곳에 가면 볼 수 있을 거야. 아마도 도서부원일걸?”

아, 도서부원이구나. 미츠야는 문뜩 도서실이라는 단어가 유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왜 도서실을 떠올리지 못한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간단하게 인사를 한 후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무작정 도서실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유이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속으로 고민하면서 그의 발걸음이 익숙하지 않은 길을 더듬었다. 주로 도서실보다는 수예부실에 있는 편이라 그런지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유이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인사를 할까? 왜 도서실에 왔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수예 관련된 책을 빌리러 왔다고 해야겠다. 그런 일련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하며, 그는 도서실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들이 무색하게도, 미츠야가 유이를 만난 것은 도서실이 아닌 도서실로 향하는 복도였다. 동그란 눈동자가 그를 눈에 담음과 동시에 크게 뜨인다. 조금 놀란 얼굴로 유이가 미츠야를 바라보다가 다가와서 반가운 기색으로 말을 걸었다.

“어! 저번에 신사에서…! 그, 전에 도와주신 분 맞으시죠? 분명 이름이… 미, 미츠 야? 미츠야였던 것 같은데… 아니면 죄송해요!”
“미츠야 맞아. 미츠야 타카시. 동갑이니까 말 편하게 해도 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유이를 만나기 위해서 도서실로 향하는 중이었고, 그녀와 복도에서 만나는 상황은 예상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유이는 미츠야가 그녀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학교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는 의미로 해석했다는 것이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미츠야는 오히려 복도에서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도서실은 조용한 분위기고, 대부분의 학생이 책을 읽기 위해서 오는 곳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기 좀 어려우니까. 그러니 도서실보다는 복도에서 만나는 게 그에게는 훨씬 이득이었다.

미츠야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었다. 유이는 그가 도쿄 만지회 소속인 것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한들 불량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적어도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불량 이미지는 피하고 싶었다. 술과 담배, 건들거리는 자세… 각종 폭력과 온갖 좋지 못한 것들의 집합체. 사람들은 불량을 그렇게 정의했다. 치후유와 가까운 사이라면 도쿄 만지회가 그리 나쁘기만 한 불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그래 봤자 불량은 불량.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 사람들은 불량이라는 한 단어만 바라보았다. 적어도 미츠야가 만난 어른, 그리고 도쿄 만지회를 제외한 친구들은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동생들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태도로 유이에게 말을 했다. 최대한 다정하게 보이기를 바라며.

“같은 학교인데, 이 기회에 친하게 지내자.”
“나야 좋지! 날 도와준 사람인데. 아, 내 이름은 아키바 유이야!”

알아. 미츠야는 그 말을 삼켰다.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주머니 속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겉으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뿐이었다. 유이와의 통성명 이후, 미츠야가 도서실에 자주 드나들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날에는 수예 관련된 책을 빌리러, 어떤 날에는 빌렸던 책을 반납하러. 또 어떤 날에는 요리 관련된 책을 읽고 싶어서.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 유이를 보기 위해 도서관에 가는 것에 대한 변명,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지만. 어찌 됐건, 미츠야의 그러한 노력으로 인해서 그들은 자주 만났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급격한 속도로 친해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친구라는 위치에 오르게 된 그는 유이에 대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유이에게 자신에 대한 것을 알려주었다. 평소 본인의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건 그의 유일한 욕심이나 다름없었다. 미츠야가 유이에 대해서 아는 것만큼 그녀도 그에 대해서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조금은 투정과도 같은 마음. 그러한 마음이 기반이 된 말들이 막을 새도 없이 쏟아졌다. 미츠야는 자신이 수예부 부장이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조금 무거운 개인사까지 말한 후에야 비로소 그가 유이의 앞에서는 제 또래 아이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대한 후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이는 너그러웠고, 미츠야의 사정을 쉽게 속단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말을 퍼트리거나 그를 함부로 정의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미츠야는 그녀가 좋았다.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으며, 남의 불행을 쉽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이는 훌륭한 대화 상대였고, 그건 미츠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를 믿고 남들에게는 쉽게 하지 못하는 말을 나눌 수 있었다. 오래 본 사이는 아니었지만, 상대를 판단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 동안 유이는 미츠야가 도쿄 만지회의 이 번대 대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과 동시에 미츠야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가족 구성원에는 부친이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바쁜 모친 대신 두 여동생을 돌본다는 사실까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츠야는 유이에게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내보이고 싶었다. 왜냐하면, 유이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알아도 상관이 없는, 비밀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동물과 먹을 것을 좋아한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서두로 그녀는 본인이 혼혈이라는 사실과 한국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왔다는 말을 했고, 치후유와는 소꿉친구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까지. 미츠야는 때때로 아는 것이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유이는 미츠야와 많은 것을 공유했고, 가끔은 그 사실이 그에게 좋지 못한 작용을 할 때가 있었다. 유이의 짝사랑 상대에 대한 것이 그러했고, 가끔 그녀가 내보이는 마음이 그러했다. 씁쓸한 다크 초콜릿을 가득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미츠야는 세상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당연한 진리를 통해 쓴맛을 잔뜩 느꼈다.

유이의 짝사랑 상대는 좋은 사람이다. 주관적으로 본다고 해도 그는 나무랄 곳이 없었다. 그녀의 초등학교 시절을 책임지던 청춘이자 지금까지도 유이의 봄이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온 유이가 반 친구들에게 다가가려고 했을 때, 그녀를 많이 챙겨 줬던 사람. 물론 그가 없었다고 해도 유이는 하고자 하는 일을 멋지게 해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에게 심리적인 지지를 해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미츠야는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유이에게는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미츠야가 들은 유이의 짝사랑 상대는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범적이고 착하며, 불량이라는 단어의 대척점에 서 있을 법한 이. 그렇기에 미츠야는 감히 유이를 욕심낼 수 없었다. 유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모범적인 사람이었고, 그는 아무리 좋게 봐도 모범하고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원래도 친구로 남아있으려고 했지만, 유이의 짝사랑 상대에 대해서 알게 되니까 이 마음을 내보이는 것이 더 두려워졌다. 그는 그들의 유대감을 비집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친구 이상의 마음은 곱게 접어서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넣어버리는 것이 여러모로 맞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미츠야는 조금 쓸쓸한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다. 단풍이 떨어지고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계절은 가끔 쓸데없는 감상을 불러일으켰지만, 겉보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그가 잘하는 것 중 하나였기 때문에 별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 역시 기꺼웠고, 선을 넘지만 않으면 이 평화는 영원할 것이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유이와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의 절친한 친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가 선을 넘을 이유는 없다고, 그러니까 쭉 이렇게 지내자고. 미츠야는 판돈으로 유이와의 관계를 건 불확실한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날은 유독 날씨가 좋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고,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따듯하면서도 시원한, 전형적인 가을의 날씨였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알맞게 섞은 듯한 날. 미츠야는 오늘 날씨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그것은 유이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오늘은 날이 정말 좋지 않냐며 웃는 유이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평생 이 날씨면 너무 좋을 것 같아. 그러게, 평생 이랬으면 좋겠다. 그러한 말들이 오가며 그의 기분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아, 오늘은 하교 같이 못 할 것 같아. 학교 끝나고 해야 할 일이 있거든! 그러니까 먼저 가.”
“응, 알았어. 늦지 않게 조심히 들어가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늦지 않게 들어갈테니까 걱정하지 마!”

또 다시 그에게로 향하는 밝은 웃음. 미츠야는 유이의 웃음을 볼 때마다 제멋대로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숨을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질리지도 않는지, 매 순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린다. 원래 좋아하면 다 이런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언제나 낯선 느낌이었다.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혹시라도 얼굴이 붉어졌을까봐 고개를 돌려서 먼 곳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혼자하는 하교는 조금 복잡한 생각을 들게 했다. 말로는 포기했다고, 친구라는 선을 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미츠야는 여전히 유이를 좋아했고, 이 마음을 접지 못했다. 혼자 가지고 있는 것도 버거웠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환한 웃음을 마주할 때마다 부풀어 올라서는 자꾸만 튀어나오려고 한다. 온몸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외치고, 제멋대로 군다. 심장은 마구 뛰었고 얼굴은 저도 모르게 빨개졌으며, 시선은 언제나 그쪽으로 향했다.

너는 나를 다정하게 만들어. 그런 문장을 읊조렸다. 유이와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즐거웠다. 입술은 언제나 호선을 그리고 있었고, 그 입에서는 다정하기 짝이 없는 말들만 나온다. 가끔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볼 때마다 이렇게나 뻔히 보이는 사람이었나 싶기도 했다. 유이가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그 맑고 동그란 눈동자 앞에서는 그답지 못하게 행동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답도 없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는데. 집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미츠야의 속은 점점 더 복잡하게 엉켜갔다. 주인에게로 향할 수 없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감히 짐작 조차 할 수 없었다. 마음 정리는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마저 그의 자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는 마음 정리를 할 수 있을리가 만무한데도 불구하고.

미츠야는 결국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집에 도착한 후에는 할 일이 몰아쳐서 잠깐의 생각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저녁 준비를 하고 동생들과 저녁 식사를 했으며, 밤늦게까지 일이 끝나지 않은 모친 대신 집안일을 해치우고 두 여동생을 재웠다. 곤히 잠들어서는 일정한 호흡을 내뱉는 동생들을 보니까 피곤하면서도 뿌듯한, 그런 묘한 감정이 속을 가득 채웠다. 본인 몸 건사하기도 힘든 나이에 동생들까지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부 박차고 나가는 것은 어렸을 때면 충분했다. 괜히 스트레칭을 한 번 하고는 이불에 풀썩 누운 미츠야가 눈을 감았다.

띠링. 맑은 알림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뚫으며 자려던 찰나를 방해한다. 미츠야는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는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이 시간에 오는 문자는 대부분 중요한 사안이거나 급한 일이었다.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라면 굳이 늦은 시간에 문자를 보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마츠노 치후유 : 미츠야군, 혹시 오늘 학교 끝난 후에 유이 누나가 어디로 갔는지 아심까? 누나네 부모님이 누나가 아직 집에 안 들어왔다고 연락주셨는데 혹시 미츠야군이 아실까 싶어서 연락드립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그는 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문자를 수십 번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문장을 온전히 이해한 후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급하게 일어선 미츠야가 문자에 답할 생각도 못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겉옷과 함께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아니, 나도 잘 모르겠어. 지금 밖으로 나왔거든? 나도 한 번 찾아볼게.]

문자를 작성하고는 미츠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져서 어두워진지 오래. 상당히 위험한 시간이었다. 저번에도 밤에 으슥한 길로 다니던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속으로는 제발이라는 두 글자를 중얼거리며, 그가 달렸다. 바이크를 꺼내서 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황스러움과 걱정, 조급함이 뒤섞여서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느릿하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 생각을 하자. 정처 없이 뛰기만 하는 것은 오히려 시간 낭비였다. 움직이던 다리를 애써 멈추고 자꾸만 고개를 드는 불안감을 눌러 죽인 후, 미츠야가 천천히 생각했다.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지. 아직 그 ‘할 일’이 안 끝나서 남아있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고 학교 근처에서 찾아보자. 이성적으로 굴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미츠야는 학교를 향해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걱정이 속에서 넘실거리며 차오른다. 혹시라도 잘못되거나 위험한 상황일까 봐, 어쩌면 두려워하는 것일수도 있었다. 미츠야는 유이를 좋아했고, 좋아하는 사람이 다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비관적으로 흘러가는 사고를 끊어내며 그는 유이를 찾았다.

유이를 발견한 것은 학교로 가는 길에 있던 공원 벤치에서였다. 몇 달 동안 봐온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뛰던 것을 멈추고 그쪽으로 향했다. 가까이 갈수록 가로등 아래에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유이. 그가 좋아하는 발음을 숨과 함께 내뱉었다.

“미츠야…?”

유이의 눈동자에 그가 담겼다. 그녀는 잠시 미츠야를 바라보더니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안 들어가고 여기에 있는 거냐고, 걱정어린 쓴소리를 하려던 미츠야가 열었던 입을 다시 닫았다. 유이가 우는 것은 처음 봤기 때문에 그는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쩌면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 같기도 했다. 투명한 눈물을 뚝뚝 떨구는 그녀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언제나 웃는 유이가 눈물을 흘릴 정도면 무척 속상한 일이 있었을 게 분명했다. 미츠야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이 한아름 묻어있는 목소리가 고요한 밤을 타고 흘러내린다.

“유이. 무슨 일 있었어?”

그 말이 무언가를 건드린건지, 유이는 꽤 오랫동안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고,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바닥으로 떨어져서 공원의 흙에 원을 그리며 적셨다. 미츠야는 그녀의 옆에 앉아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잘게 떨리는 몸을 토닥였다. 아직 무슨 일인지 듣지는 못했지만, 그녀에게 속상한 일이 있었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고작 예상뿐인데도 불구하고 유이에게 속상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니 머리 한구석이 차갑게 식어내렸다. 우는 건 기뻐서 우는 것 하나면 충분하다.

[유이 찾았어.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치후유에게 문자를 보내고 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늘 들고 다니는 손수건을 꺼내서 유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평소에 이것저것 많이 가지고 다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흐느끼는 소리가 잦아들며 어느 정도 진정을 한 듯 보이는 유이가 축축한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언뜻 보인 그녀의 눈 주변이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진정되지 않은 숨이 몇 번 이어지더니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은 유이가 몇 번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는 듯이. 미츠야는 유이의 말이 정리될 때까지 기꺼이 기다렸다.

“미츠야, 나 차였다?”

유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현실감이 없는 건지, 조금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도 문뜩 본인의 상황에 마음이 답답해져서 울상을 지었다.

“여자친구가 있었대. 몇 년을 좋아했는데, 내가 좋아한 그 감정들이 한순간에 끝난 게 너무 속상하더라. 근데도 몇 년 동안 봤는데도 그 사실을 안 알려줬다고, 그 애를 원망하고 있던 내가 너무 한심해……. 정작 용기 내서 먼저 말하지도 못한 겁쟁이는 나면서.”

미츠야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비참한 것 같기도 했다. 나라면 울게 하지 않았을 텐데. 언제나 즐겁게 만들어줄 자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는 문뜩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한 것처럼 느껴졌다. 객관적으로 봐도 미츠야는 유이에게 그 애만큼 영향을 끼칠 수 없었으니까. 아니, 주관적으로 봤을 때도 그러했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봐도 미츠야는 친구였고, 그 애는 유이의 짝사랑 상대였기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그 애가 걷어찬 자리를 그가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그 누구도 모를 게 분명하다. 미츠야도 본인의 감정을 전부 재단할 수 없었으니까. 스스로도 자세히 모를 정도로 그의 감정은 너무나도 깊었다. 처음에는 그저 웅덩이로 시작했지만, 유이를 만나고 알아가는 시간이 쌓여서 호수를 만들고, 강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었다. 감정을 재단하겠다고 바다에 들어갔다가는 파도에 휩쓸려 죽을 것만 같아서, 미츠야는 그 깊이를 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깊은 감정은 사람을 비정상적으로 만든다. 때로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바꿔주기도 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은 사람을 비관적이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당당한 사람도 그 앞에서는 뒷걸음질을 쳤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그 앞에서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꼈다. 미츠야는 그 깊이를 자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유이를 포기하지 못할 테고, 위험을 감지한 순간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버린 후일 것이다. 어쩌면 사랑이라고 정의하게 될 정도로 무거워질수도 있었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가 결심한 모든 것을 깨부술만큼 커질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미츠야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같이, 겁쟁이에 한심하고 어리광만 부리는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

내가. 내가 널 좋아해. 그 말이 목구멍을 가득 채우고 혀끝까지 올라왔다. 내뱉고 싶다는 마음이 반, 이 말을 내뱉었을 때의 미래를 무서워하는 마음이 반. 여기서 섣부르게 행동한다면 여태껏 그가 노력해온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난 채로 부서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유이가 저런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넌 겁쟁이도 아니고, 한심하지도 않고, 어리광만 부리지도 않는다고. 설령 네가 겁쟁이에 한심하고 어리광만 부려도 널 좋아할 사람이 네 눈앞에 있다고…. 미츠야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말을 내뱉었을 때 유이와 멀어지게 되는 건 아닐지 두려웠다. 다른 건 전부 괜찮았지만, 더이상 그녀의 환한 웃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겁쟁이는 유이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미츠야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진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이와 멀어지게 되는 건 싫었지만, 그녀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건 더 싫었다. 유이는 미츠야가 본 사람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빛났고,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이였다. 그렇기에 미츠야는 그녀와 조금 멀어지게 되어도 할 말은 하자고 생각했다. 멀어지면 가까워지면 된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상관없다.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다시 가까워질날이 올테니까.

“나, 너를 좋아해. 그러니까… 친구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서두를 시작하니 이야기는 쉬웠다. 미츠야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숨기고는 말을 이었다. 따지자면 고백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 처음 봤던 날 기억해? 그때, 신사에서. 사실 그날 너한테 첫눈에 반했거든. 네가… 네가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쁜 거야. 머릿속에 박혀서 떠나지 않아서, 그래서 치후유한테 너에 대해서 물어봤어. 너에게 고백할 용기도 없으면서 친구라도 되고 싶어서 너에게 일부러 찾아간거고. 너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네가 좋아지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에 겁먹고 내 마음을 말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거 있지.”

유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릴없이 떨리기만 하는 심장이 원망스럽다가도, 오롯이 그 눈에 담긴 제 모습이 좋았다. 미츠야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너의 친구 자리라도 지키고 싶어서 고백은 엄두도 못 내고 곁에 있었어.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 엄청 한심하지. 우리 똑같네, 안 그래?”

미츠야는 그렇게 말하고는 태연한 척 웃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그가 한 말은 고백이긴 했지만, 마음을 전하는 것보단 유이에게 알려주기 위함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한심한 사람은 세상에 많다고. 감히 너는 한심하지 않아, 같은 위로를 할 수는 없었다. 유이의 속상한 감정과 답답한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였다.

미츠야는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왔다. 세상에는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했고,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은 어렸을 적에 끝낸 지 오래였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오히려 할 수 없는 것을 하겠다고 나섰다가는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었기에, 그는 하지 못하는 일을 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노력, 의지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자신 보다 강한 사람을 이기기 위해, 한계를 넘기 위해 달려드는 것과 미성년자가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다른 종류의 일인 것처럼. 따지자면 지금 상황도 후자에 속했다. 유이의 속상함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미츠야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는 오랜만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고작 이 정도밖에 못 해주는 게 싫었다. 미츠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유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그와 동시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미츠야는 당황스러운 감정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 대답을 바란 건 아니니까 부담 갖지는 마.”

횡설수설 나오는 말에 결국 그는 입을 닫았다. 유이는 시선을 피하는 미츠야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태연하게 웃는 모습이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당황한 모습, 붉어진 그의 귀가 눈에 들어오자 묘한 느낌이 속을 간질였다. 오빠 같은 미츠야도 부끄러워하는구나. 귀여워. 그 생각을 서두로 그가 한 모든 행동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언제나 다정한 눈빛으로 유이를 바라보던 모습도, 상냥하게 웃던 모습도, 항상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달려와주던 모습까지. 그녀를 좋아한다고 외치는 듯한 그의 행동들이 떠오르자 문뜩 유이는 쑥스러워졌다. 모두에게 그러는 거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한 모든 면모가 색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미츠야의 붉어진 귀 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얼굴 전체가 빨간색으로 물든다. 더운 날씨도 아닌데 화끈화끈한 얼굴에 괜히 손부채질로 얼굴에 몰린 열을 식혔다. 유이가 잠시 속에서 말을 골랐다. 떠오르는 단어 중에서 가장 예쁜 말을 골라낸 그녀가 천천히 문장을 만들어서 입 밖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용기 내서 말해줘서 고마워, 미츠야. 너는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네 고백에 답변을 해주고 싶은데…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있을까?”

유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기색이었다. 아니, 어쩌면 조심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오늘 그녀가 고백에 대한 답변을 받고 운 것처럼, 혹여라도 본인의 말이 그를 속상하게 할까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굴었다. 미츠야는 그런 유이의 면모가 좋았다. 아니, 그저 유이가 좋았다. 다정하거나 배려심이 깊다는 말은 그저 부가적인 이야기였다. 설령 유이가 다정하지 않아도 그는 그녀를 좋아하는 감정을 멈추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이유는 필요 없었다. 정말 바보 같은 말이지만 그냥 아키바 유이라는 사실 하나가 모든 설명을 대체했다.

“그, … 꽤 오래 좋아해 와서, 마음 정리하면서 천천히 생각해보고 싶어. 미츠야를 정말 좋게 생각하니까… 가볍게 여기고 싶지도, 쉽게 넘기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어.”

미츠야는 유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그녀를 꼭 붙잡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고마워. 나도 노력할게. 네가, 나를 친구가 아닌 그 이상으로 볼 수 있도록. 네 마음을 확실하게 살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다가갈게.”

만약에, 네가 진심으로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고민하지 말고 말해줘. 미츠야가 덧붙였다. 친구를 연애 상대로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기에, 그는 최대한 기대를 덜어내고 덜어냈다. 초마다 늘어나는 감정을 덜어내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마음 정리를 해두는 것은 필수불가결적인 일이라고. 유이를 좋아하기에 더더욱. 그녀가 그를 이성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괜히 속상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것에는 죄가 없다. 감정은 일방적일 수는 있지만, 그 일방적인 것을 상대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됐다. 준 만큼 돌려받고 싶어 하는 것은 이기적인 거지, 결코 좋아한다고 할 수 없었다.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미츠야는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기대를 하나둘씩 덜어냈다. 좋아하는 만큼 타격이 클 것이 분명하기에.

유이가 미츠야를 보고 웃었다. 그러고는 벤치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상황. 지금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은 미츠야였고, 그런 그를 오롯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유이였다.

“가자! 잘 시간이잖아. 집에 가야지.”

미츠야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또다. 속이 다시 한 번 간질거리며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조금 벅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붉게 부어오른 눈을 살짝 만지작거리던 유이가 그의 손을 붙잡은 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손을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듯했지만, 미츠야는 그 사실을 굳이 알려주진 않았다. 그저 그도 눈치채지 못한 척 손을 잡은 채로 걸어갈 뿐이었다. 조금은 미묘한 적막이 그들의 사이를 가득 채웠지만 그러한 적막 속에서도 어색한 공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평소에 함께 하교했던 것처럼, 함께 걷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익숙해 보였고 그와 동시에 편안한 기색이 묻어있었다. 결국 그들은 유이의 집에 도착 할 때까지 손을 잡은 채로 걸었다.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수많은 이야기를 서로에게 내던졌다. 그렇게 그들은 적막을 통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맞잡은 손으로 온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유독 날씨가 좋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새가 지저귀고 검은색 길고양이가 노랗게 빛나는 눈을 뜨고 담 위를 걸어 다녔으며 길가에 떨어진 단풍잎에서 가을의 향이 살짝 묻어나오는, 여름의 낭만과 겨울의 순정이 미세하게 뒤섞인 바람이 불어 오는 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관계에 의문점이 던져지고 변화라는 계절이 찾아온 날이기도 했다.

(11,91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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