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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by mitsuyui 2023. 7. 2.

(뫄님)

새 나라의 어린이는 전부 잠들었을, 고요한 어느 밤. 미츠야는 여느 때와 같이 루나와 마나를 잠자리에 눕힌 후 집회를 위해 신사로 향하던 참이었다. 최근 도쿄 만지회의 구역에서 얼쩡거리는 신생 폭주족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집회가 열렸고, 미츠야는 대장으로서 불참할 수 없었기에 열리는 집회마다 꼬박꼬박 참석해야만 했다. 물론 도쿄 만지회의 창립 멤버이자 대장으로서, 도쿄 만지회에 대한 애착이 있었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집회에 참석하지 않게 되면 불안할 것이다. 소수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도쿄 만지회는 대부분이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어떤 결론이 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차라리 조금 피곤해지더라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것이 훨씬 나았다.

바이크는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한적한 도로 위를 달렸고, 바람은 날카롭게 살결을 스치며 지나간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주머니 속에 있는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한 것은 신사를 바로 앞에 도달했을 무렵이었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미츠야는 한 손으로 바이크를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전화기를 꺼냈다. 발신인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팸 번호인 것은 아니었기에 미츠야는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 미츠야 군? 저는 유이 언니인데, 혹시 유이랑 같이 있나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미츠야는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불길한 생각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눈을 깜빡였다. 대답을 채근하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올 때까지, 그는 입을 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저기 미츠야 군? 의아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 후에야 미츠야는 바이크를 멈춰 세우고는 대꾸했다. 아니요. 저, 유이가 집에 안 들어왔나요? 약간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항쟁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유이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은 결코 좋지 못한 신호였다. 아무런 연락 없이 밤늦게까지 밖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미츠야는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불길함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고, 그 와중에 돌아온 긍정은 온몸의 피를 차갑게 만들었다. 유이가 계속 연락이 없단다. 주변 친구들한테 다 연락을 돌렸는데 그중 유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설마를 배제할 수 없는 현실에 미츠야는 자기도 유이를 찾아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어지간히 비윤리적인 이들이 모인 게 아니라면 일반인을 싸움에 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보통의 불량은 어지간히 비윤리적인 이들이 하는 것이었다. 미츠야는 유이에게 전화를 걸며 이번만큼은 제 예상이 틀리기를 바랐지만,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이할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에 알 수 없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마치 그가 그녀에게 전화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신호음이 끊긴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도쿄다이진구 뒤쪽 폐건물, 혼자. 딱딱하기 짝이 없는 텍스트로 쓰인 문자를 보자 미츠야는 곧바로 바이크가 향하던 방향을 바꾸었다. 집회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고, 문자를 남길 틈조차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려서,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바이크의 속력을 최대로 올리는 게 전부였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찬 바람이 온몸을 긁고 지나갔다. 바람에 형체가 있다면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나갈 정도로 달리는 바이크는 사고가 나지 않는 게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목적지와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유이, 제발 무사해줘. 미츠야의 머리에 가득 찬 것은 오직 유이가 무사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반인을 납치할 정도로 막무가내인 이들이라면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기에, 미츠야의 속은 시간이 지날수록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털끝이라도 다치면, 아니, 설령 다치지 않는다고 해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이 그쪽에서 마련한 덫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미츠야는 결코 그 덫에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봤자 신생. 고작 이런 비겁한 수나 쓰는 이들에게 지는 것은 도쿄 만지회 대장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유이, 많이 무섭겠지. 한편으로는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이는 싸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반인이고, 아마도 치후유나 그가 아니었으면 평생 불량배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했다. 태어나서 주먹 한 번 휘둘러본 적 없을 이의 인생에 끼어들었으면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유이도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그를 인생에 들인 거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만약이라는 가정이 튀어나왔다. 아마도 미츠야만 아니었으면 유이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납치 같은 건 당하지 않았을 테고, 누군가에 의해 위협을 느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미츠야는 그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필연과도 같은 일이었고,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들, 유이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심만 버렸어도 그녀는 평생을 이런 일 없이 안전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츠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이를 좋아하고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을 고백한 것을 후회할 수 없었다. 그건 좋아하는 마음에 대한, 그리고 이런 위험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선택한 유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가 지금 후회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다는 것. 지금 상황에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후회하는 것은 사치였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바이크를 몰았다. 더 후회할 상황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닌 이상, 죄책감을 느끼는 건 유이를 구한 후에 해도 충분하다.

한편, 미츠야가 향하고 있는 폐건물로 잡혀 온 유이는 이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무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무력감보다는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공포에 가까웠다. 두렵기도 했고,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으며, 까슬한 밧줄 때문에 손목과 발목이 쓰라려서 괜스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물론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저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겪게 되는 것은 꽤 많은 차이가 있었기에 유이는 차분한 마음을 유지할 수 없었다. 사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 하고 넘겨온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녀가 각오하고 있었던 것은 그저 납치를 당하거나 휘말릴 수 있다, 그뿐이었지 그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공포는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아직 누군가에게 맞은 것도, 크게 다치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리고 머릿속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손목과 발목에서 느껴지는 쓰라림과 끌려오면서 넘어지는 바람에 생긴 무릎의 상처가 온 신경을 다 가져가는 와중에,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가 있는 게 더 이상했다. 아파. 유이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온몸이 쓰라리고 욱신거린다. 싸움에 자주 노출되는 이들이라면 별거 아닌 상처였지만, 살면서 누군가와 주먹 다툼을 해본 적 없는 유이에게 계속해서 시큰거리는 상처와 피범벅이 된 무릎은 너무나도 생소하고 지독한 종류의 것이었다.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주변에 불량배는 많은데, 그녀를 도와줄 사람을 단 한 명도 없다. 그 말인즉슨, 누군가가 와서 구해주는 게 아닌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의미였다. 치후유가 자주 보는 순정 만화에서 단골 소재로 쓰이는 납치는 그저 주인공들이 가까워지는 로맨틱한 사건 중 하나였는데, 실제로 겪어보니까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설레는 것도 능력이다. 유이는 무사히 집에 가면 치후유의 순정 만화를 다 불태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무사히 집에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튀어나오자 또다시 기분이 침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전혀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가 없다. 치후유의 순정 만화를 불태우기는 무슨, 집에 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미츠야가 와주기를 바라는 마음 반, 그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반. 그녀를 납치한 목적을 알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봤을 때 그가 괜히 위험해지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결국 유이도 사람이었기에 위험하더라도 와주기를 바랐다. 집으로 가고 싶다. 무사히. 집에 가서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싶었다. 많이 걱정하고 있겠지, 다들. 또다시 가족들을 생각하니까 눈에 열기가 몰렸다. 미츠야, 나 무서워…. 무릎이 너무 아파. 속으로 계속 그의 이름을 곱씹는 것이 유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이, 밖에 바이크 소리 들리지 않냐?”
“왔나 본데, 미츠야 타카시. 연장 준비해라. 오자마자 정신 차릴 틈 없이 몰아쳐야 해. 혼자라고 해도 도만의 대장까지 한 녀석이라고.”

끼이익. 건물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보, 혼자 오면 어떡해. 다치면 어쩌려고….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묘하게 안심이 돼서, 유이는 잔뜩 경직된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달려드는 이들에 그녀의 몸이 다시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문을 열자마자 그를 향해 쇄도하는 고철 파이프에 유이가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차마 그가 다치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미츠야의 고통 어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그 대신 여러 번의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여러 명의 앓는 신음이 들려왔다. 유이가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다행히도 멀쩡하게 서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미츠야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고철 덩어리를 주워 들고는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각목을 쳐냈다. 그러고는 붉은색의 리젠트 머리를 한 이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명치를 가격했다. 처음에는 수적으로 열세에 몰려있어 이길 가망이 없어 보였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순식간에 한 명씩 정리해 가는 미츠야에 유이는 다시금 안도할 수 있었다. 크게 다치지는 않겠구나.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의 뒤로 누군가가 다가와서 고철 덩어리를 휘둘렀다. 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에, 유이의 머릿속이 흰색 물감을 덕지덕지 칠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일순 새하얗게 변했다.

"미츠야!"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외친 유이는 그의 머리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에 울상을 지었다.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뚝 흘러내렸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해 봐도, 그가 다쳤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들어오자 본능적으로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급하게 눈물을 닦아내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괜히 크게 다치지 않겠다, 그런 생각을 해서 그가 다친 것만 같았다. 물론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미안함이 속을 쿡쿡 찔러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유이는 무릎에 난 상처만 해도 아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는데, 머리를 고철 덩어리로 가격당한 그는 얼마나 아플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함정인 걸 뻔히 알면서 혼자 온 미츠야도, 싸움을 하지 못해서 도울 수 없는 스스로의 처지도 너무나도 속상했다. 물론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았다. 애초에 이렇게 싸움에 휘말린 것조차 그녀의 능력 밖의 일이고, 따지자면 미츠야와 도쿄 만지회의 일에 휘말려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 역시 알았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미츠야를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이는 그를 원망할 수 없었다. 이 일의 원인은 그가 아닐  뿐더러 설령 일의 원인이 그라도 해도, 그녀를 지키기 위해 뻔히 보이는 함정으로 혼자서 온 사람을 어떻게 원망할 수 있을까. 아니, 만약 미츠야가 혼자 오지 않았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을 저지른 것은 도쿄 만지회가, 그가 아니었다. 그저 불량 집단 하나가 제멋대로 그녀를 납치한 것뿐이었다. 도쿄 만지회가 사주한 것도, 그녀가 납치되기를 원한 것도 아닌데 그들을 탓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었다. 도덕적인 잣대 속에서 그녀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보통의 사람이었고, 그녀의 도덕이 판단한 바에 의하면 도쿄 만지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나쁜 건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지, 그 외의 사람들이 아니다. 적어도 일의 당사자인 유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작은 세력의 집단인 건지, 안 그래도 얼마 없던 이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두 손으로 전부 셀 수 있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미츠야는 피가 흐르는 머리가 신경 쓰이지 않는 건지, 아픈 기색도 없이 그들을 상대했다. 물론 수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격에 당하기도 했고, 밀리는 순간도 있었지만 기이할 정도로 강렬한 집념으로 그는 우위를 점령해 갔다. 아직 끝이 난 것도 아닌데 싸움의 승자는 굳이 끝을 보지 않아도 뻔했다 남은 사람은 고작 두 명. 심지어 둘 다 몸싸움의 경험이 몇 번 없는 건지 엉성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유이는 주먹을 꾹 쥐었다. 싸움이 전부 끝나면, 바로 미츠야를 병원에 데려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여전히 손목과 발목은 쓰라리고, 무릎은 욱신거리며 고통을 주었지만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남은 동료 한 명마저 순식간에 얻어맞기 시작하자 마지막 남은 한 명이  돌발 행동을 한 것은 그때였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러가며 주변을 살피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이내 이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건지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쇠 파이프를 쥐고는 유이를 향해 달려왔다. 순식간에 남자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으며 팔로 목을 졸라왔다. 대응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유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가느다란 비명을 내뱉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미츠야의 시선을 끌어오기에는 충분했다.

"유이!"
"어이, 미츠야 타카시! 이, 이 여자가 다치는 걸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순순히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무릎을 꿇는다면 여자는 해치지 않겠어. 네 자식의 손에 달려있다고, 이 여자의 안전은!"

이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미츠야도, 유이도 알고 있었다. 사실 비겁하게 누군가를 인질로 잡는 사람이 약속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애초에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 무력이 없는 사람을 인질로 잡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유이는 미츠야가 저 말을 들을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투항을 하고 안 하고에 상관없이 유이를 공격할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만에 하나에 걸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유이는 그런 식으로 미츠야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도, 뺨에 난 생채기도 전부 그녀를 구하려다가 생긴 상처였다. 그를 이 이상으로 다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유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신 차려, 아키바 유이. 스스로를 다그치자 한결 머릿속에서 해야 할 일이 또렷하게 정리가 되는 것만 같았다. 벗어나자, 이 상황에서. 깨물든, 발로 차버리든. 어쨌든 미츠야에게 방해가 되는 상황에서 벗어나자. 물론 실행을 하려니 손이 잘게 떨렸고, 혹시라도 실패하게 되면 상황이 더 악화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됐지만 남은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유이는 아무것도 시도해 보지 않고 그저 남에 의해서 구해지는, 순정 만화 속 여주인공 역할은 싫었다. 기회가 없을 때면 몰라도, 기회가 왔는데도 무섭다는 이유로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좋아하는 사람이 다친다면 더더욱. 유이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고는 뒤로 고개를 팍 젖혔다. 머리가 쨍하고 울려왔지만 아프다고 멈춰있을 틈은 없었다. 팔에 힘이 풀린 순간, 유이는 강하게 팔을 깨물었다. 잇자국으로 살이 패일 정도로 깨문 유이가 아예 풀어진 팔에서 벗어났다. 그 과정에서 땅바닥을 굴렀고, 팔꿈치가 바닥에 쓸렸기에 눈물이 가득 차올라 눈에 그렁그렁하게 맺혔지만 울지 않기 위해서 눈에 힘을 주었다. 아픈 건 너무너무 싫었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고작 이런 사람들 때문에 우는 건 싫다. 유이는 쓰라린 감각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서 심호흡을 했다.

그녀가 위험에서 벗어나자, 미츠야는 멈칫하던 것을 멈추고 순식간에 비틀거리던 남은 한 명을 걷어찼다. 그가 발길질에 밀려나 넘어지자 미츠야는 정신을 차릴 시간도 주지 않고 주먹을 꽉 쥔 채로 강하게 그를 내리쳤다. 그의 코에서 붉은색 액체가 흘러내렸고, 충격에 기절을 한 건지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제서야 미츠야는 주먹에 힘을 풀고 유이에게로 다가올 수 있었다.

“유이.”
미츠야가 유이의 이름을 읊조리듯 불렀다. 그의 손은 바쁘게 유이의 손목과 발목에 묶인 밧줄을 풀어내고 있었고, 유이는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고통을 참기 위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츠야는 밧줄을 풀면서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많이 무서웠지? 미안해. 나 때문에 괜히 이런 일 겪게 만들어서…. 널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고, 이런 일에 휘말리게만 하고."
“….”
“저기, 유이. 만약에… 만약, 네가 나랑, 그러니까… 네가 나로 인해서 겪게 되는 상황들이 버겁다면. 혹시라도 그런 생각이 들면, 나는….”

그제서야 미츠야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알아차린 유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타카시. 미츠야가 대답했다. 응, 유이. 그녀는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에 신중을 기울이며 말을 내뱉었다.

“네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무서웠어. 나는 아픈 게 너무 싫은데, 납치당하면서 쓸린 무릎도 아팠고 밧줄 때문에 손목이랑 발목도 아팠어. 혹시라도 집에 무사히 돌아가지 못할까 봐, 많이 걱정했어.”
“미안해.”
“사과하라는 말이 아니야, 타카시. 이 과정에서 너를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나쁜 건 나를 납치하고 다치게 한 사람들이지, 네가 아니야. 너는 날 구하러 왔잖아. 나를 위해서 혼자서, 너를 잡기 위한 덫이라는 걸 알면서도 온 거잖아. 나는 이게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너는 내게 원인이었던 적 없어. 혹시라도 나에게 헤어져도 좋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거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 이 모든 게 상관이 없을 정도로 타카시를 좋아해.”

미츠야가 떨리는 손으로 유이의 볼을 매만졌다. 그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불안한 모습이었다. 유이는 그 모습에 괜스레 속상했다. 언제나 단단하던 미츠야가 불안해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불안하게 만들어 버린 게 미안했다. 그리고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 싫었다.

“만약에,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면? 네가 또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다고 해도, 그래도 괜찮겠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난 앞으로도 도만의 대장일 거고, 도만이 존재하는 한 항쟁은 계속해서 일어날 거야. 그 과정에서 네가 몇 번이나, 아니, 어쩌면 몇십 번이나 위험에 처할 수도 있어. 오늘보다 훨씬 크게 다칠 수도 있어."
“네가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혼자서 나를 구하러 왔을 때, 너는 어떤 생각을 했어? 내가 미웠어? 나 때문에 다칠까 봐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었어? 내가 납치당한 게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미츠야의 표정에 균열이 생겼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유이는 뺨을 감싼 그의 손을 쥐고는 끌어 내렸다. 꼭 맞잡은 손에서는 따듯한 온기와 함께 그의 떨림이 전해져왔다. 바보,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이렇게 긴장할 거면서. 미츠야의 진심이 손끝으로 기어 올라온다. 헤어져도 괜찮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주제에 헤어지고 싶지는 않다는 듯이 손을 꽉 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유이는 그 힘이 기꺼웠다. 그녀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밉지 않고, 너 때문에 또 다치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어. 아니, 애초에 너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 자체가 없어.”

물론 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다. 이번에 겪은 일이 또 일어나면, 당연히 공포심을 느낄 것이다. 싸움이라고는 어린애들의 말싸움이 전부였던 유이에게 폭력은 여전히 낯설고 두려웠으며,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걸 감내할 수 있었다. 그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이런 일에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자신감에는 만에 하나 위험에 처한다고 해도 미츠야가 그녀를 구하러 올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를 위해서 미츠야는 기꺼이 와줄 것이다. 오늘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일이 또 있게 되면, 네가 나를 위해 와줄 거니까. 나 하나도 안 무서워. 그리고 오늘 나도… 조금 위험했지만, 마냥 당하기만 하지는 않았잖아. 네 여자친구, 당하고만 사는 사람 아니라고? 그러니까 괜찮아. 미츠야.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에게 중요한 건 지금이지,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니까. 혹시 모를 상황을 걱정하다가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아.”

유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맑은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도 그의 인생을 이루는 조각이 되고 싶었고, 그가 자신의 인생을 이루는 조각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물론 계속 만나고 오랜 시간을 보게 되면, 그 시간만큼 여러 일이 생길 것이다. 오늘 같은 일일 수도 있었고, 오늘보다 더 심각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싸우게 될 수도, 어쩌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유이는 그 일련의 시간 속에 부정적인 일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일이 있다면 긍정적인 일이 있는 것이고, 불행이 있다면 행복이 있는 법이다. 부정적인 사건만 걱정하느라 그와 쌓을 수 있는 추억과 함께하는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유이와 맞지 않았다. 후회를 하게 될 수 있다고,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어쩌면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을 거라며 비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이는 그런 이들을 향해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 그 후회마저 그녀의 몫이라고. 미래의 자신이 감당해야 후회가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겁을 집어먹고 그를 멀리하게 되는 상황이 더 큰 후회가 될 것이라고.

“정말 만약에, 만에 하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또 지키기 위해 와줄 거지?”
“약속해. 네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게 하겠다고, 맹세할게.”
“그럼 된 거야. 미츠야, 정말 좋아해. 네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나 너를 좋아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 때문에 위험해졌다느니 버거우면 그만둬도 된다느니, 그런 이야기 하지 마. 이기적인 말이지만, 네가 전심전력으로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나를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왜냐면 내가 그러니까. 너를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너를 좋아하니까. 그 말은 꿀꺽 삼켜버리고는, 유이가 다시 한번 말간 웃음을 지었다. 그와 함께한 매 순간이 좋았고, 흘러넘치는 무거운 감정이 기뻤다. 좋아해,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커다랗고 따듯한 손을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 게 없었다. 아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처음 봤을 때까지만 해도 친애에 가까웠던 감정은 너무나도 커져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애정이 되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서, 차마 쉽사리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유이는 이게 좋아하는 감정 그 이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건 찰나의 것일 수가 없었다. 그저 좋다, 그 정도로 끝내기에는 너무나도 짙었다.

“집에 가자, 미츠야.”

유이가 그를 이끌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신발에 닿는 발목이 쓸렸고, 무릎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감각이 머릿속을 어질러놓았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그토록 원하던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집으로 가서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고 싶었다. 물론 그 전에, 미츠야의 치료가 더 급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쓱 훑는 그를 작게 타박하며, 그녀가 건물의 문을 열었다. 구석진 곳에 있는 탓에 주변이 밝지는 않았지만 한결 해방감이 느껴졌다. 전부 끝났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내뱉은 유이가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는 바이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바이크를 가볍게 톡톡 치며 이야기했다.

"바이크 여기서 기다리느라 많이 쓸쓸했겠다. 미츠야가 잘 달래줘, 알겠지? 앞으로 오래오래 미츠야와 함께 할 애마잖아."

그 말에 미츠야는 비로소 마음 편히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머리는 욱신거리고 몸은 잔뜩 피곤했지만, 이 고통마저도 기껍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응, 잘 달래줄게. 유이, 데려다줄 테니까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걱정 많이 하시는 것 같더라. 치료 제대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미츠야는 또다시 밤의 도로를 달렸다.

(905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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