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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겨울,

by mitsuyui 2023. 5. 12.

(뫄님cm)

약간은 쌀쌀한 어느 가을. 푸른색으로 빛나며 여름을 그리던 나뭇잎은 어느새 붉은 단풍이 되어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미식의 계절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지 달콤한 향이 거리를 꽉 채웠고 아주 덥지도, 그렇다고 아주 춥지도 않은 날씨에 사람들은 집에서 나와 여유를 즐겼다. 유이는 발걸음을 느릿하게 옮기며 지나가는 길에 있는 단풍을 운동화로 쓸었다. 부스럭 소리를 내며 갈색 단풍이 조각조각 나뉘어서 부서진다.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바스러지는 단풍의 비명은 어딘가 쓸쓸한 구석이 있어서, 가을을 체감하게 만들었다.

유이는 느지막하게 따라오는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올려서 나란히 선 미츠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잠깐의 순간, 눈이 마주치며 그의 얼굴에 웃음이 머문다. 그 모습에 속 한구석이 설렘에 울렁울렁, 눈동자가 속을 잔뜩 헤집어 버린다. 나 진짜 많이 좋아하고 있구나, 미츠야를. 그러다가도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놀라 붉어진 얼굴을 팩 돌리자 미츠야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유이의 소매를 쥐었다. 슬금슬금 손목을 타고 내려오던 손이 다정하게 유이의 손을 감싸며 온기를 전한다.

“약간, 음. 좀 덥네.”
“그러게. 바람은 쌀쌀한데 여전히 온도가 좀 높은 것 같아. 막 여름이 지나가서 그런가?”

붉어진 얼굴로 서로가 아닌 곳을 바라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린 유이와 미츠야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시선 한 번 마주쳤다고 설레고 즐거워하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게 느껴지다가도 기꺼웠다. 다시 한번 붉은 가을의 단풍을 꾹꾹 밟아 지나가며, 그들은 함께 맞이하는 계절을 만끽했다.

“그러고 보니까 곧 크리스마스네. 우리 크리스마스 때 만나기로 한 거 기억하지? 그때 뭐할 건지 미리 정해둬야 하지 않을까? 몇 시에 만날지도 정해야 하고, 어디 갈 건지도 정해야 하고, 으음… 뭐 먹을지도 정해야지.”
“아직 크리스마스는 한 달이나 남았는데?”
“아직인 게 아니라 벌써야! 한 달밖에 안 남았으니까 어디 갈지 정도는 정해둬야 하는걸.”

잔뜩 기대에 부푼 말에 한 달이면 많이 남은 거 아니야? 라고 대꾸하면서도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려버리고야 만다. 간질간질. 유이는 미츠야의 웃음에 괜스레 쑥스러워져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심장에 깃털을 문지르는 것 같이, 그 간지러운 감각에 저도 모르게 따라 웃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음, 그날 뭐 하지? 일단 밥부터 먹을래? 이 근처에 엄청 맛있는 파스타집이 있는데, 같이 가자! 소개해 주고 싶어. 한 번 먹으면 홀딱 반해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니까 좀 기대된다. 원래도 기대하고 있었지만. 파스타 먹고 카페 갔다가 영화 볼래? 크리스마스 시즌에 영화 엄청 많이 개봉하던데.”
“응, 영화 보자! 크리스마스면 사람 좀 많으려나? 미리 예매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런 기대를 잔뜩 품은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맞잡은 손을 달랑거렸다. 크리스마스 데이트라니, 낭만적이야. 유이의 볼이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서 단풍을 닮은 빛으로 물들었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났고, 크리스마스 날에 함께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미츠야라는 사실에 기뻤다. 그 외의 단어로는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없다고 유이는 생각했다. 아니, 기쁘다는 단어마저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구름에 푹 빠져서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막막한 현실 같은 건 생각도 안 날 정도로 기분이 마구 들떠 올랐다.

“그럼 크리스마스만 기다리고 있어야겠네.”
“시험이나 이것저것 다 끝났으니까 이제 시간이 좀 빨리 갔으면 좋겠다. 크리스마스도 그렇고, 방학도 빨리했으면 좋겠어.”

가로등이 하나둘 켜질 무렵, 다 와 가는 집을 바라보며  유이는 미츠야와 더 오래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걷고 있는 거리가 조금만 더 길어진다면 그녀는 어제보다 조금 더 행복해지리라. 작별 인사는 무척 길었다. 헤어지기 싫은 마음 만큼. 물론 결국에는 느릿하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지만.

기대에 부풀어 오지 않은 날에 대해서 이야기한 날, 하늘이 유이의 말을 들어주기라도 한 건지, 크리스마스 전의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시험도 평가도 전부 끝나가던 차라 남은 한 달은 상당히 여유로웠고, 그와 동시에 자유로이 풀어진 분위기였다. 모든 이가 학교의 느긋한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 놀고 떠들기만 하는 학교 분위기에 유이의 마음 역시 풀어지다가도 문뜩 주말에 미츠야와 만나기로 했던 것이 생각나서, 시간이 날 때 틈틈이 해야 하는 일을 끝내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 오지 않을 것처럼 멀게만 느껴지던 크리스마스가 물씬 다가와 겨울의 향을 코끝에 대고 간질이기 시작했다. 구름에서 떼어낸 것만 같은 새하얀 눈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하더니 거리에 쌓였고, 바쁜 현대인들의 발길에 치여서 너저분해졌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마침내, 이 서늘한 추위에 익숙해질 무렵에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남녀노소 종교를 불문하고 반기는 빨간 날. 가족, 연인, 친구와 만나 하루를 즐기는 특별한 날. 누군가는 남의 생일을 왜 축하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불퉁한 말을 내뱉을지도 모르지만, 그마저도 모처럼의 쉬는 날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유이는 아침 일찍부터 잔뜩 들떠서는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어차피 두툼한 겉옷을 입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옷을 비교하고, 괜스레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정리하고, 얼굴이 이상하지는 않은지 이리저리 살펴보던 유이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급히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상쾌하다 못해 차갑기 짝이 없는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새하얗던 얼굴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늘 바람은 유독 춥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즐거운 기색을 감추진 않는다. 유이는 오늘 하루를 정말 기다려 왔고, 최고의 하루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거센 바람에도 기꺼이 웃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일이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리라는 법은 없었다. 유이는 어쩐지 데이트를 하는 내내 미츠야가 불안해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시종일관 어두운 얼굴로 바깥을 힐끔거렸고 핸드폰의 겉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앞이라고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티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항상 꼼꼼하고 섬세하며 어른스러운 미츠야가 이렇게 정신없이 초조해하고 불안해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 시간이 오래된 것은 아니었지만 유이는 그를 만날 때마다 유의 깊게 살펴보았고, 좋아하기에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세한 차이마저도 순식간에 알아채고 대략 어떤 일인지 파악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도 않았다. 미츠야와 관련된 일 중 그가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일을 꼽자면 높은 확률로 가족의 일이거나 동아리 일, 혹은 도쿄 만지회의 일일 것이 분명했다. 동아리 일은 대부분 미츠야가 아니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외에는 안 일어나니까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을 테고, 가족의 일이라면 진작 유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우거나 했을 테니 아닐 확률이 높았다. 신경은 쓰이지만 차마 말은 못 할만한 일. 도쿄 만지회와 관련된 일 외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다. 오늘 무슨 항쟁이라도 있나? 아니면 누가 위험한가? 막연히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문뜩 심각한 얼굴을 한 미츠야를 시야에 담는다. 그래, 어떤 일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큰일이 아니라면 미츠야가 저런 얼굴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이 상황에서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미츠야에게 심각한 일이고, 그 일에 신경이 쏠려서 아무것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 일을 해결하러 가라고 보내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유이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다가 그와 눈을 맞추며 느릿하게 그를 불렀다.

”미츠야, 무슨 일 있는 거지?“
“어?”
“말하기 어려운 건가 싶어서 안 물어봤는데, 표정도 어둡고 데이트에 전혀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장난스러운 말투로 툭 말을 내뱉자, 순식간의 그의 얼굴이 미안함으로 물든다. 유이가 이번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알았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나 티가 많이 났나 싶어서 애꿎은 테이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연 그가 사과하려던 찰나였다. 유이가 먼저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미츠야의 말을 가로챘다.

“무슨 일인지 안 물어볼게.“

그러다가도 문뜩 자신이 예상하는 일이 맞았다면, 혹시라도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대신, 두 가지만 약속해 줘. 장난스럽고, 한편으로는 다정한 기색이던 얼굴이 진지해진다. 유이는 정말 중요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는 미츠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최대한 다치지 말 것, 그리고 꼭 이길 것! 알겠지? 나랑 약속해야지 내가 안심할 수 있으니까, 빨리 새끼손가락 걸어~ 약속!“

새끼손가락만이 꼿꼿이 펴있는 손이 그를 향해서 쓱 내밀어진다. 그토록 기다리던 데이트가 망한 것으로 모자라서 이른 끝을 맞이하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유이는 뭐가 그리도 좋은 건지, 마치 부드러운 솜털 이불과도 같은 새하얗고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츠야도 조금 마음이 놓인 건지, 전보다는 풀어진 얼굴로 새끼손가락을 걸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꾹 찍었다.

“두 약속 모두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지만,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 볼게. 최대한 안 다치고 이겨서 돌아오기. 오늘 내 목표야.“

그러고는 유이의 손을 한 번 꼭 잡으며 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다정한 인사를 남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결연한 얼굴로 카페 밖으로 나선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하더니 이내 달려서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 그런 미츠야의 멀어져가는 등을 바라보다가 짐을 정리했다. 사실 별로 정리할 만한 짐도 없었다. 그래봤자 휴대전화기, 지갑, 이것저것 들어있는 작은 가방이 짐의 전부였으니까. 데이트를 제대로 끝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유이의 속에는 그저 그런 아쉬움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미츠야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 제 시간에 보내서 정말 다행이라는 안도감,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걱정까지.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서는 소용돌이쳤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에 들어가 씻고 옷가지로 잔뜩 어지럽혀진 방을 정리하고 미츠야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지만. 유이는 잠시 카페에 앉아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일어서서 마셨던 음료를 정리하고 집으로 향했다. 부디 모든 일을 잘 끝내고 오기를.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머릿속은 내내 미츠야의 걱정이었다.

유이가 미츠야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예상한 것에 비해서. 해가 져서 잔뜩 어두워진 시간이었지만 집 앞이라는 문자에 옷만 걸쳐 입고 헐레벌떡 나간 유이는 잔뜩 다쳐서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미츠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싸움에는 전혀 일가견이 없는 그녀가 보아도 심각하게 느껴질 정도로 미츠야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아니, 곱게 말해서 좋지 못한 것이지 거의 너덜너덜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손에는 붉게 물든 붕대가 감겨 있었고, 얼굴에는 자잘한 상처부터 새파란 멍까지 다양한 폭력의 흔적들이 있었다. 유이는 사람의 얼굴에 이렇게 많은 상처가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고작 보고만 있는 것뿐인데 자신에게도 고통이 전해지는 것만 같아서,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친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아픈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미츠야의 모습을 이리저리 훑어보기만 하자 기나긴 침묵을 이기지 못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최대한 다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미안. 그래도 이기겠다는 약속은 지켰는데… 칭찬 안 해줄 거야?“

그 말에 유이가 게슴츠레 미츠야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다친 건 생각도 안 하는 건지, 치료도 제대로 안 받고 와서는 하는 말이 칭찬 안 해줄 거냐는 말이라니. 완전 본인 몸은 생각하지도 않는 바보처럼 느껴지다가도 바로 달려와 준 미츠야에 괜히 더 그가 좋아진다. 걱정할 것을 알고는 있었는지, 다쳐서 너덜너덜하기는 해도 후유증이나 목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라는 걸 보여주러 온 그가 고맙기도 했다. 문자로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쉽게 걱정을 떨쳐낼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니 한시름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물론 멍이나 상처가 나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그 이상의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유이는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은 미츠야의 손을 잡았다. 아픈 건지 움찔 떨어대는 그에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정하게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갠다.

“바보. 뭐,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너를 좋아하는 나도 바보인 건 마찬가지지만. 고생 많았어, 타카시.”

그러고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인다. 최대한 안 다치기로 한 약속 못 지켰으니까, 약속 다시 하자. 다 나을 때까지는 낫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괜히 무리했다가 늦게 나으면 안 되잖아. 그 말에 미츠야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유이에 기분이 좋기도 했고, 약속을 안 하겠다고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듯이 게슴츠레 바라보는 유이가 그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기꺼이 대답했다. 좋아, 약속할게. 약속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고, 그와 동시에 약속을 지키지 못할 이유 역시 없었다. 맞잡은 손에서 겨울의 찬 바람을 뚫고 온기가 전해져왔다. 그 온기의 이름은 애정이었다. 다정한 온기 속에서 그들의 크리스마스가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형태로 지나갔다. 앞으로 얼마든지 있을 다음을 새끼손가락으로 약조하며.

(5,112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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