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우정

mitsuyui 2023. 3. 18. 12:47

(뫄님 커미션)

교과서에 단정하게 쓰인 글씨를 느릿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쓸어내린 유이는 기대에 부푼 얼굴로 그것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처음 일본으로 오겠다고 하였을 때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모자란 일본어 실력이 향상되기는 할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마음 한가득 설레는 마음이 차올랐다. 쓰기나 말하기는 많이 부족하고 어색했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면 이마저도 늘어나게 되리라. 책가방을 어깨에 걸친 그녀가 괜히 거울 앞에서 빙그르르 돌며 온몸을 훑었다. 하얀색 리본이 눈에 띄는 검은색 원피스 위에 고급스럽게 생긴 란도셀을 걸치자 첫 등교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동시에 꼭 좋은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유이의 마음속에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유이네 가족은 얼마 전, 한국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본래 그녀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일본인이다. 그러던 중 한국에 관심을 가진 그가 한국으로 와서 정착했고, 운명처럼 한국 사람에게 사랑에 빠졌는데 그 한국 사람이 유이의 어머니였다. 그 이후 둘은 한국에서 쭉 지내며 딸을 세 명 낳았고, 간간이 일본 문화와 언어를 가르쳐주면서 한국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따지자면 일본인 아버지 외에는 일본과 별다른 접점이 없던 유이가 아예 일본에서 살게 된 이유는 단순한 것이었는데, 아버지의 직장이 일본에 지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지사 일본에서 일을 해줄 직원이 필요했고, 마침 유이의 아버지가 일본인인 것을 알고 있던 회사에서는 발령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발령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법도 했지만 유이의 어머니는 아이들의 언어 능력이 더 발달하게 될 것이라 기뻐했고, 유이를 포함한 세 자매는 발령에 대해서 무슨 말을 얹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렸다. 그렇기에 그녀의 가족은 큰 반대 없이 일본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친구들과 헤어지게 되었고, 익숙하고 정들었던 집이 아닌 어색하고 불편한 집에서 살게 되었지만 큰 불만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일본은 아버지의 나라였고, 어렸을 적부터 일본에 대해서 틈틈이 배웠으니까. 적어도 일본 문화나 듣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들은 빠르게 이사를 했고, 알던 사람들과 작별을 했으며,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와 모든 서류 과정을 끝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일본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 오늘인 것이다. 오늘 아이들은 등교를 하고 아버지는 일본 지사에 일을 나가기 시작한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유이는 그 어느 때보다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초등학교 3학년, 혼자 학교에 갈 수 있는 나이지만 길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어머니가 함께 등굣길을 나섰다.

걷는 내내 한국에서는 자주 듣지 못한 일본어들이 우르르 귓속에 박히기 시작했다. 친구들끼리 인사하는 소리부터 시작해서 어제 있었던 일이나 좋아하는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학부모끼리의 수다까지. 알 수 없는 단어들도 종종 있었으나 또래 친구들의 말은 정확히 귀에 들어와 꽂혔다. 유이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고, 배정받은 교실로 향했다.

“새 친구가 왔어요. 한국에서 온 친구이니 반갑게 맞이해줍시다!”

활기찬 목소리의 선생님이 유이를 간단히 소개해주며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의 주의를 끌어모았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며 입술 사이에서 튀어나올 말을 기다렸다. 순수하고 동글동글한, 악의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눈동자가 유이를 바라보았다.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인사를 뱉어냈다.

“안녕, 하세요. 아키바 유이라고… 합니다. 한국, 에서 왔어요. 잘 부, 부탁드릴게요.”

더듬더듬 연습한 문장을 내뱉은 유이가 가방끈을 꾹 잡았다. 어눌한 발음 때문일까, 교실은 아이들의 순수하고 맑은 웃음소리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더없이 깨끗하고 명랑한 웃음소리와는 다르게 유이의 기분은 왜인지 모르게 꿉꿉하게 젖어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웃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커다란 웃음소리를 비집고 튀어나온 어떤 목소리가 악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너 알아듣기는 해? 일본어도 못하는데 왜 일본에 왔어?”

선생님이 만류하기는 했으나 아이들은 굴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목소리는 순수했고 천진난만했으며, 정말 궁금하기에 물어본다는 기색이 잔뜩 묻어있었다. 하지만 말의 내용은 유이를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정말 충분했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라는 게 정말이냐, 한국에서 살기 힘들어서 온 거냐, 말은 왜 이렇게 못하는 거냐, 그런 물음들이 호기심이라는 명목하에 마구잡이로 쏟아진다. 심지어 유이의 어눌한 발음을 따라 하며 친구들 사이에서 웃음을 유발하려고 하는 짓궂은 아이들도 있었다. 선생님이 안 계시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아이들이 몰려와서 그녀를 놀렸다. 발음이, 혼혈이라는 점이, 한국에서 왔다는 것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의 학교생활이었다.

유이는 친구들의 놀림이 싫고, 가끔은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미 일본에 오기로 결정한 것을 무를 수는 없었다. 가족들은 이미 일본이라는 나라에 다 적응했는데 자신만 적응하지 못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곤혹을 겪게 되는 사람은 유이가 아닌 부모님이었기에 함부로 학교에서의 일을 말할 수도 없었다. 결국 학교에서의 일은 꾹꾹 참고 있다가 자기 전날에 숨죽이며 우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매번 퉁퉁 부어버려 따가운 눈을 감아 잠을 청했고, 아침에는 숨죽여 운 탓에 목이 따가웠다. 하지만 참고 견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 말라는 이야기마저 어눌하게 나오는 탓에 기껏 낸 용기는 언제나 짓밟혀졌으니까. 결국 언제나 그녀의 모든 목소리는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그날은 유난히 습한 날이었다. 온몸이 무겁고 이유 없이 불쾌했으며, 다른 사람과 닿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지만 어김없이 친구들은 유이의 주변에 몰려들어서 툭툭 치고 지나가거나 괜히 말을 해보라며 종용했다. 간혹 입을 꾹 다문 유이에게서 먼저 목소리를 튀어나오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장난이라는 이름의 고약한 내기를 하기도 했다. 밀치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꼬집어서라도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아이들에 일부러 더 꾹 입을 다문 유이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교실에서 나와 바로 집을 향해서 달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유난히 속 한구석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거대한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배 속 장기가 뒤틀리는 것만 같았고, 세상이 기이하게 일렁거리며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문뜩 제가 왜 이런 상황에 부닥쳐야 하는 건지, 억울함과 속상함이 밀려와서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파도는 출렁이고 출렁이다가 넘쳐 눈에서 흘러나왔다.

뚝, 하고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안에 있는 바다를 전부 쏟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후두둑 떨어져 손과 옷을 적신다. 유이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소매로 거칠게 닦았지만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은 끊임없이 볼을 타고 떨어졌다. 마치 세상을 전부 잠식할 것처럼, 바닥의 주홍색 벽돌에는 갈색 원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느릿한 발걸음을 재촉하며 유이는 숨죽였다. 매일 밤 방에서 숨죽여 울었던 것처럼, 두 손으로 눈물을 닦는 대신 입을 틀어막고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저기, 너 울어? 왜 울고 있어?”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유이는 손으로 입을 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살짝 돌려서 제 뒤에 서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올라간 눈꼬리의 남자아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물음은 해맑고 그 어떠한 의도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처음 보는 남자아이의 물음에 유이는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아…?”
“왜 울고 있는 거야? 슬픈 일 있었어?”

혹시라도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머릿속을 뒤져보았지만 일본은 물론이요, 한국에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몹시나 편안했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태연했기에 유이는 괜스레 남자아이를 한 번 더 훑어보았다. 예쁘게 빛나는 눈동자가 정확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러 번 훑고 누군지 고민해도 나오지 않는 답에 유이는 울던 것도 멈추고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울고 있던 탓에 목소리는 물기로 잔뜩 젖어있었다.

“누구, 세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아직 말하기는 익숙하지 않은 탓에 어눌한 발음이 튀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말한 후에 놀라서 다시 입을 막은 유이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혹시라도 이 남자아이가 다른 애들처럼 놀리거나 비웃지는 않을까,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나쁘게 굴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이 속 한구석에서 차올랐다. 만약 나보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하면 뭐라고 답해야 하지? 한국이라고 대답했다가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이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한테 발음이 왜 이상하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턱 끝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유이가 걱정한 것과는 다르게,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국적이나 발음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밀 뿐이었다. 누구냐는, 어눌하고 뚝뚝 끊어지는 말에 대한 대답이 그의 입술 사이의 틈에서 흘러나온다.

“마츠노 치후유, 올해로 초등학교 이 학년!”

이름을 들으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판 초면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유이는 갑작스러운 타인의 개입에 경계하며 잠시 그를 훑었다. 처음 치후유가 말을 걸었을 때, 누군지 알기 위해서 훑었던 것과는 다르게 어떤 목적으로 말을 건 건지, 해를 끼칠 생각은 없는지 알기 위함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을 대하는 것 치고는 우스운 반응이었지만 그녀가 여태껏 당한 괴롭힘은 전부 초등학교 3학년, 그리고 그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이들이 했던 것이었기에 유이에게는 당연했다. 그러나 그를 훑어내리던 중 마주친 치후유의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는 위해를 끼치려고 다가온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짙은 걱정이 흐르고 있어서, 유이는 그가 순전히 호의를 가지고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진심 어린 걱정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연 유이가 더듬더듬, 여전히 어눌하고 느릿한 말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한국에서 왔… 는데, 반 친구들, 이 자꾸 놀려서…. 발음도… 이상하고, 말도 잘, 못… 하니까.”

제가 봐도 어눌하고 우스운 발음이었지만 치후유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고 간간이 대답하면서, 알아듣지 못한 말은 한 번 더 말해줄 수 있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면서 길고 느린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어쩐지 그 상황에 마음이 편안해지다가도 괜스레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유이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낯선 땅에서 받은 또래의 배척과 놀림은 속을 곪게 만들었고, 그와 동시에 낯선 땅에서 받은 낯선 사람의 다정함은 속을 따듯한 감정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축축하던 뺨이 서서히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꿉꿉하고 습하던 날씨도 어째서인지 상쾌하다는 느낌이 피어올랐다.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발음이나 이것저것... 내가 가르쳐줄게.”
“저… 정말?”
“당연하지!”

유이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어주던 치후유는 그녀의 말이 끝난 듯싶어지자 잠시 고민하더니 힘차게 대꾸했다. 어쩐지 얼떨떨한 느낌에 유이는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다가, 치후유의 말을 이해한 후에 깜짝 놀란 듯 크게 눈을 떴다. 약간은 기쁘기도 했고, 초면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치후유에게 고마운 감정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궁금했고, 이런 도움을 받아도 괜찮은 건지 의문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게 진심인지, 아니면 허울뿐인 말인지 물어봤겠지만 치후유의 눈에 담겨있는 감정이 너무나도 진지하고 다정해서 유이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믿지 않기란 어려웠다. 아니, 믿고 싶었다. 타지에서 처음 겪은 다정함이었기에 더더욱. 설령 치후유의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기뻐했을 터인데, 한 올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라니. 기쁨, 환희, 감사. 그러한 긍정적인 감정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던 속으로 치고 올라온다.

너무 많이 운 탓에 따가운 눈을 소매로 비빈 유이가 기쁜 웃음을 지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치후유가 그녀의 첫 친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친구, 그 단어를 혀로 굴려보니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불안하게 쿵쿵거리던 심장은 어느새 콩닥콩닥 뛰며 기쁨의 몸집을 부풀렸다. 유이는 고양이를 닮은 작고 다정한, 그러면서도 씩씩하고 힘찬 치후유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치후유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새 친구라는 이름은 정말 좋은 거구나. 한국에서 친구를 사귀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어쩌면 긴 고난과 힘든 시간 끝에 생긴 친구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날 이후, 치후유와 유이는 말 그대로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치후유는 헷갈리는 발음이나 유이가 물어보는 단어의 발음을 몇 번이고 또박또박 설명해주었고, 유이는 치후유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익히고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만약 듣기가 안 됐다면 소통에 문제가 있었겠지만 다행히 유이는 치후유의 말을 빼먹는 것 하나 없이 알아들을 능력이 있었다. 분명 전에는 듣고 싶지 않은 내용까지 들어야 하는 탓에 쓸데없이 좋은 듣기 능력이 싫었고, 약간은 원망스럽게 느껴졌지만 치후유와 있을 때만큼은 기꺼웠다. 그는 더듬거리며 느릿하게 말하는 유이의 속도에 맞추어 기다려주었고, 단 한 마디의 불평불만도 없었기에 편하기도 했다. 가끔은 동화책을 통해서 간단한 쓰기를 배웠고, 때로는 교과서를 이용해서 말하기 연습을 했다. 노래를 틀어놓고 따라부르면서 자연스럽게 발음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역시 치후유가 생각해낸 좋은 아이디어였다. 대체로 유이의 집에서 만났고, 책이 필요할 때는 도서관에서 만났다. 치후유가 유이의 손을 잡아 이끌며 치후유의 집으로 향할 때도 있었으며 시간과 장소를 신경 쓰지 않고 만날 때마다 가르침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유이의 발음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말을 더듬지 않게 되더니, 속도까지 붙어서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학교 친구들이 더 이상 놀릴 수 없을 정도로, 정말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호칭의 변화가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치후유와 유이는 정말 오랫동안 붙어 다녔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나이가 다르다는 사실도 알았으니까. 치후유는 1살이 많은 유이에게 누나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유이의 호칭은 치후유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하루 종일 붙어서 공부하고 놀고, 그리고 시작을 보내다 보니 서로의 가족이 그 존재를 알아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요즘 자주 노는 애 이름이 뭐니, 그런 가벼운 질문부터 시작해서 결국에는 치후유의 모친과 저녁 약속까지 잡게 된 유이의 부모는 아이와 함께 노는 남자아이가 어떤 애인지, 그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저녁의 만남은 생각보다 순탄했고 성공적이었다.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그의 어머니는 꿋꿋하고 당당한 사람이었으며 치후유 역시 그러한 어머니의 밑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아서 타인을 배려하고 도울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마츠노 가족에게 호감이 생긴 유이의 부모님은 저녁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모임의 흐름을 끌어나갔고, 헤어질 때쯤에는 새로운 약속을 잡고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어른끼리의 왕래가 생기자 이전보다 조금 더 편한 만남을 가질 수 있어서 유이는 좋았다. 가끔 같이 놀러 갈 수 있었고, 어른들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치후유랑 놀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그러한 교류를 좋게 받아들였다.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조금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고, 유이는 치후유와 함께 다니고 도움을 받으며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싫은 것을 적당히 끊어내는 방법을 알았고, 느린 속도로 말을 해도 느리지 않게 느껴지도록 하는 방법도 알았고, 발음은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치후유에게 배운 것은 이러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유이는 어느 습하고 꿉꿉한 날 자신이 받은 호의를, 이제는 남에게 베풀 줄 알았다. 길에서 누가 울고 있으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이유를 물어볼 줄 알았고, 함께 고민하고 기꺼이 나서서 해결을 도울 줄 알았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치후유에게 영향을 받았고, 그와 동시에 치후유에게 영향을 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이는 이 문장이 제법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 이상적이기 짝이 없는 친구 관계였다. 그리고 본래의 자신이 마냥 말을 못 하고 움츠러들기만 한 존재가 아닌,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것 역시 좋았다. 그날 울고 있기를 잘한 것 같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치후유와의 만남은 그녀의 인생을 정반대로 바꿔버렸다. 인생을 따라 걷다가 주저앉아도 서로 일으켜 세워주고 나무라줄 친구. 그녀는 이제 그러한 친구가 있었다. 단짝, 절친, 베스트 프렌드, 짱친. 온갖 좋은 이름을 붙여도 아까운 관계가 존재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위축되거나 겁먹지 않았다. 제가 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기 때문에 굳이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다. 치후유의 존재는 유이의 용기가 되었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출발이었다.

치후유도 잘하고 있겠지? 유이는 자꾸만 치후유의 쪽으로 향하는 생각을 정비하며 괜히 책가방 끈을 손에 꾹 쥐었다. 요즘 따라 자신의 여러 변화를 절절히 실감하게 된 어느 봄, 새 학기가 다가와서 새 반에 배정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 유이는 여전히 떨리는 마음으로 교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고 점점 나이를 먹어 이전의 반 친구들과는 떨어지게 되었다. 물론 붙은 친구들도 몇 명 있었지만 전부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에 유이를 놀리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던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별로 큰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치후유가 알려준 대로만 하면 돼. 수십 번을 스스로에게 되뇐 유이가 뒷문을 열고는 발을 내디뎠다. 새하얀 실내화가 매끈한 바닥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밟고 지나갔다.

주섬주섬 책가방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아 낯선 얼굴들을 둘러보던 유이는 뒷자리 여자애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조용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아이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타인과 말을 섞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벌써 친해져서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을 묘하게 부러운 기색으로 힐끔힐끔 바라보는 것을 보아하니 그런 건 또 아닌 듯했다. 유이는 잠시 마음을 정리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일단 던져보자는 심정으로 몸을 돌린 그녀가 최대한 친절하고 상냥하게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안녕, 난 아키바 유이야.”

처음 치후유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때 열심히 연습했던 문장이 매끄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뒷자리 친구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여태껏 유이가 걸어온 길과 해온 행동들을 생각하면 무척 놀랍고 커다란 도전이었다. 그리고 평소라면 제대로 다가가지 못하고 우물쭈물 기다리고만 있었을 그녀가 먼저 나서게 된 것은 순전히 치후유 덕분이었다. 유이는 절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수십 번 듣고 난 후에야 겨우 자신감을 가졌고, 치후유가 알려준 대로 최대한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앉은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아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지, 잠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응, 안녕. 그러고는 가방 속을 주섬주섬 뒤져서 사탕 한 개를 내밀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사탕 봉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유이는 그 사탕을 손에 쥐고는 소중한 것을 모시는 것처럼 주머니 속에 넣었다. 친구한테 받은 사탕이니까 잘 보관해야지. 그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린 유이가 잠시 다음 이어갈 말을 고민하다가 느릿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매끄럽기 짝이 없는 말투가 유이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치후유가 봤다면 장족의 발전이라며 마구 박수를 쳤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치후유가 없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반에 사람들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유이에게도 누군가 말을 걸었다. 차분한 어조로 여태껏 연습했던 대로만 이야기를 한 유이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만족감을 느꼈고,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의 유이를 기억하던 아이들은 조금은 얼떨떨하고 묘한 기분으로 그런 그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모두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면 작년까지는 조용히 있다가 올해부터 친구들과 잘 지내보려고 하는 한국인 혼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노력해서 실제로 변화를 일으킨 사람을 계속해서 놀리기에는 마냥 어린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이는 일본에서 겪는 최고의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적당히 친한 친구들과 처음 생긴 동갑의 베스트 프렌드. 물론 치후유는 비교가 불가능한 친구지만, 같은 나이의 친구들은 약간 다른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가끔 그녀가 덜 적응한 부분에서 난처한 기색을 보일 때마다 도와주는 친구도 있었다. 그 사실이 유이의 학교생활을 무척이나 밝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학교 가기 전날 밤에 눈물로 베개를 적시지 않았고, 아이들의 놀림에 제가 뭘 잘못했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치후유가, 그리고 모두가 도와준 덕에 유이는 속상하고 암담하던 학창 시절을 지나 일본에 녹아들 수 있었다. 그저 겉에서 부유하고 있는 존재가 아닌, 그 속에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유난히 덥고 습한 날,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에는 우중충한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고 어쩌면 비가 와서 젖은 뺨을 가려주길 바랐던 날. 유이는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날 덕분에 최고의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더없이 힘들게 느껴졌던 시간을 겪은 탓에 최고의 친구와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괴롭힌 아이들을 용서했다거나 좋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살아온 삶의 모든 일을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보지는 않게 된 것이었다. 우주 속에서 멍하니 떠다니던 유이는 어느새 일본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구의 중력과도 같은, 친구라는 존재가 그녀를 기꺼이 지구에 속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최고의 친구를 만났다.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고, 더 나아가서 앞으로의 일상과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유이는 이 모든 영광을 기꺼이 치후유에게 돌리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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