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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mitsuyui 2023. 2. 19. 23:45

(뫄님 커미션)
첫번째 이야기
두번째 이야기

큰일이다. 유이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책상 위에 놓인 문제집은 펼친 게 무색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덩그러니 존재했다. 전혀 집중이 되지 않는 마음을 가다듬고 가다듬으려고 해도 쉽사리 정리되지 않아서, 그녀는 계속 만지작거리던 펜에서 손을 떼어냈다. 머리가 복잡해서 공부에 집중하려고 노력해봐도 금방 흐트러진다. 원인은 얼마 전에 들었던 미츠야의 고백이었다.

유이의 머릿속에서 고백은 꽤 단순한 위치에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 정말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받아주면 사귀게 되지만 받아주지 않으면 어색한 사이로 남게 되는 것. 짝사랑 경험은 한 번이 전부인 데다가 그마저도 대차게 차였으니, 고백에 대해서 세세하게 고찰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고민할 이유나 여유가 없다고 해도, 지금까지 내려온 고백에 대한 모든 정의를 철회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원인은 요즘 따라 집중이 잘 안되는 이유와 같았는데, 지난번에 들은 미츠야의 고백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른 탓이었다. 오랜 짝사랑이 끝나서 울고 있던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어진 위로이자 진심. 그것을 본 이상, 유이는 고백이라는 단어를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용기 내 진심을 이야기한, 그 고백이라는 행위는 조금 더 복잡하고 심오한 정의를 동반할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안에서 그 정의가 뚜렷하게 자리를 잡을수록 머리 한구석이 엉키는 것과 동시에 하루 종일 그날 밤의 일만 떠올랐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부터 고즈넉한 분위기, 조금은 꿉꿉하게 느껴졌던 공기까지.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생생한 채로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일에 집중이 안 되는 바람에 잠시 동안만 잊으려고 해도 유이의 일상에 미츠야가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아서, 사소한 계기가 자꾸만 그날로 그녀를 이끌었다. 가끔은 함께 했던 하굣길이 되었고, 이야기를 나누던 점심시간이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도서실이 되기도 했다. 무시해버릴 수 없을 정도로 일상에 녹아든 그의 존재가 커서, 유이의 고민은 점점 부풀어 올랐다. 이렇게까지 그녀의 삶에 미츠야의 흔적이 남아있을 줄 몰랐던 유이는 조금은 느릿하게 생각해보려던 것을 철회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하기에는 그녀는 학생이었고, 학생의 본분을 다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본분을 다한다며 대충 결론을 내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미츠야의 쑥스럽다는 듯이 붉어지는 얼굴을 봤다면, 그리고 마음을 전하는 잘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다면 결코 그래서는 안 됐다. 진중하되 느리지 않게. 유이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자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을 듣게 된 이후, 유이는 이제껏 주어진 미츠야의 호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두에게 줄 수 있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숨이 벅찰 정도로 거대한 것까지. 친구라는 관계는 이유가 될 수 없는 수많은 호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를 의식하는 행위를 멈출 수 없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여태껏 눈치채지 못한 감정들이 툭툭 흘러나와 유이를 적셨다. 어쩌면 느릿했고, 그러면서도 강렬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 속으로 녹아든 그는 더 이상 친구라는 애매한 관계로 남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미츠야는 그가 말했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작게는 평소에도 자주 하던 칭찬부터, 크게는 데이트 신청까지. 애초에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고 해도 유이는 자꾸만 그의 행동을 곱씹게 됐을 것이다. 미츠야는 종종 동생들의 것을 만드는 김에 같이 만들었다며,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하면서 손수 만든 도시락을 건넸다. 그저 겸사겸사, 혹은 친해서 만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전부 좋아하기 때문이라니. 심지어 도시락이 끝이 아니었다. 귀여운 인형이나 찢어진 교복을 수선해주는 등, 그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 왜 이걸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감정은 언제나 명확한 양상을 보여왔다. 그 외에도 함께 등하교를 하자고 제의하거나 습관처럼 도서실에서 만나 함께 책을 읽는 것, 점심시간에 대화를 하는 행동까지. 반복되어 굳어진 일상이 전부 그의 용기인 동시에 그녀를 향한 마음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유이는 잠시 고민했다. 만약 내가 미츠야의 상황이었으면, 똑같은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얼마 전에 차이긴 했지만 그녀도 짝사랑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꽤 길게 이어져 왔다. 처음부터 그 애를 좋아했다면, 다가가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친해질 수 있었을까. 글쎄. 유이는 쉽사리 결론을 내리진 못했지만 그 답이 부정에 가깝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첫눈에 반한 상태였다면 그 애와 친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은 떨리는 일이었고, 그 상대와 친하지 않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친한 상태에서 좋아하게 되는 것과 좋아한 상태에서 친해지는 게 같을 리가. 그녀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미츠야와 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용기 내 행동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의 용기가 더 크게 다가왔다. 유이였으면 같은 상황에서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였기에, 그녀가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행동을 한 그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긴, 미츠야는 원래도 용기 있는 편이긴 했다. 섬세하고 사려 깊은 부분도 있었지만 괜히 도쿄 만지회가 아니었다. 그는 곧은 것과 동시에 거침이 없었고, 주저하지 않았다. 유이는 그런 미츠야의 면모를 좋아했다. 누군가는 불량인 그가 무섭지 않은지 의문을 던질 수도 있겠지만, 글쎄. 애초에 소꿉친구도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는데 무서워할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치후유와 미츠야로 인해 도쿄 만지회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미츠야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점점 더 다가오기 시작했다. 본인이 했던 말대로, 친구가 아닌 그 이상으로 볼 수 있을 법한 행동과 말이 그에게서 튀어나왔다. 유이는 얼마 전에 그가 다가와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정한 기색이 잔뜩 묻어나오는 얼굴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그의 입에서 매끄러운 음성이 흘러나온다.

“유이, 근처에 맛있는 디저트 가게가 생겼다고 그러는데…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아? 너랑 같이 가고 싶은데.”

그러고는 이거 데이트 신청이야, 라고 덧붙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유이는 수락했고, 그들은 그 주의 토요일에 함께 디저트 카페를 다녀왔다. 즐거웠던 그날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가도 문뜩 이마저도 미츠야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을 자각해서 얼굴이 붉은 단풍빛으로 물든다. 왜 이렇게 자주 생각이 나는 건지. 이건 분명히 그날 들은 고백이 그녀의 속에서 크게 자리 잡은 탓임이 분명했다. 잊을 수 없는 고백이자 위로였으니 그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미츠야의 마음에 대해서 유이가 진중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고, 미츠야도 적극적으로 본인의 마음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으며, 그들이 벌써 네 번의 사적인 만남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데이트라는 단어로 칭해도 될 정도로, 그 만남의 코스는 지극히 평범한 연인의 것을 닮아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미츠야와의 관계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유이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 관계에 대한 정의를 언젠가 내려야 할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머지않았다는 것 정도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 미츠야에게 빨리 답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반, 그래도 조금 더 천천히 결정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반.

모르겠다, 모르겠어! 유이는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계속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잘 시간을 훌쩍 넘긴, 조금은 늦은 시간이었다. 이대로 계속 고민하다가 하루를 지새우는 것보다 내일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보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잠시 미츠야와 데이트, 고백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그건 제법 현명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민으로 인해 머리가 복잡했던 것이 한순간에 가라앉으며 그녀는 다음날을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눈을 뜬 유이가 만약 어제 바로 자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다가 분주하게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어떻게 되겠어, 하루를 꼴딱 지새우고는 퉁퉁 부은 눈으로 학교에 갔겠지. 어쩌면 지각했을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니 어제의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한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져서, 그녀는 기분 좋게 학교로 향할 수 있었다. 물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등굣길에는 미츠야가 함께 하고 있었다.

유이의 일상에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교생활까지 바뀐 건 아니었다. 학교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조금은 지루한 수업을 이어갔고,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는 졸다가 쉬는 시간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복도로 나가 놀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도서실에서 책을 정리하다가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복도로 나오게 되었고, 여기까지만 해도 그리 특별한 변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두 남녀는 그녀의 시선을 붙잡아 기분을 땅바닥까지 떨어트리기에 정말 충분한 역할을 했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틈에서 그들을 잠시 바라본 유이는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려고 애써 시선을 돌렸다. 요즈음 미츠야 덕분에 실연의 아픔을 곱씹을 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좋아하던 사람이 여자친구와 웃고 있는 건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었다. 물론 괜히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이는 그저 친구들의 말에 동조하는 척 고개를 끄덕거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모래를 잔뜩 씹은 것처럼 입 안이 텁텁하고 속 한구석이 불편했지만, 이 감정이 지나갈 때까지 참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괜히 불편하다는 티를 내며 힐끔거려서 눈치 빠른 몇몇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보단 조금 참고 견디는 게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훨씬 나은 방법일 거라고 유이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저조한 기분도 덮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을 수 있었다.

물론 상처를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하면 곪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덮어둔 기분도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던 유이도 이런 일이 반복되고 반복되니 조금씩 얼굴에 한가득 그리던 웃음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를 향한 마음은 천천히 지우고 있었고, 그 잔재를 거의 정리해서 얼마 전 길었던 짝사랑의 막을 내려둔 상태지만 속 한구석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괜히 쓰라리다. 유이는 애써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었고, 그와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미츠야와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밝은 웃음을 지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를 전하려고 했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하긴, 웃기지 않은데 웃을 수 있을 리가. 결국 유이는 조금 어정쩡한 미소를 짓고는 종이 곧 칠 것 같다며 반으로 돌아갔다. 마음이 복잡하다. 짝사랑은 끝난 지 오래인데, 여전히 정리되는 건 단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울적해졌다.

미츠야를 다시 본 건 마지막 쉬는 시간 때였다. 일부로 찾아온 건지, 그는 유이의 반 앞에서 기웃거리다가 몇 번 대화를 나눠본 이에게 그녀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창가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느라 미츠야가 반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그녀는 반 친구의 말에 책을 덮고 복도 쪽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정한 미소를 지은 미츠야가 눈이 마주치자 그녀를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유이는 심장 한구석이 덜그럭 소리를 내며 추락하는 것처럼, 기이한 불안감을 느꼈다. 만약 아까 일 때문에 여전히 그 애에게 미련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면 어쩌지? 내가 너무 우유부단하게 있었나? 이렇게 질질 끌고 있다가 미츠야와 어색한 사이가 되는 건 싫은데.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상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혹시라도 그가 미안, 나 널 좋아하는 게 지쳐와 같은 이야기를 꺼낼까 봐.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그에게 신경을 쓰는 자신이 생소했다. 물론 평소에도 미츠야에게 관심이 있었고, 정말 친한 친구 중 한 명으로서 신경을 써왔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저 친구를 신경 쓰는, 그런 관심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이건 명백히 친구 이상의 관심이었다. 혹시라도 오해할까 싶어서 걱정하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유이는 조금씩 그에게 친구 이상의 호의를 가지기 시작했고, 그 호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쌓여서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미츠야가 말했던 대로 유이는 더 이상 그를 친구로만 보지 않게 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그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칭하기에는 조금 조심스러웠다.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감정은 톡 치면 부서질 정도로 연약한 것과 동시에 조그마한 크기였다. 여태껏 친구라는 이름으로 쌓아왔던 것을 이성으로 다시 쌓으려고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었다. 갑작스러운 관계의 변화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둘의 성격이 태생부터 세심하고 배려심 깊은 편이라서 무너지지 않은 거지, 둘 중 한 명이 조금이라도 지금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 위태로운 관계마저 잘 이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유이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복도로 나갔다. 스크래치가 있는 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이 스크래치를 좋아했다. 살짝 처진 눈매와 짧게 자른 머리도, 바느질로 인해 굳은살이 박인 길고 곧은 손가락과 한쪽 귀에 달랑달랑 매달린 귀걸이도 좋아했다. 문뜩 거기까지 생각하자 그의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쑥스러워서, 그녀는 가득 차 있던 생각을 지웠다. 맑은 눈동자가 미츠야를 응시했고,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러고는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학교 복도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소란스러웠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게 고요했다. 그들의 사이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느릿하게 흘렀고, 이 침묵은 깨지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려던 무렵이었다.

“유이.”
“응? 앗, 어어! 왜?”

침묵을 먼저 깨트린 것은 미츠야였다. 사실 언제나 그러했다. 그들 사이에 정적이나 거리감이 내려앉으면 그걸 먼저 깨트리고 다가오는 사람은 항상 그였다. 새삼스럽게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에 그녀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다시 그의 말에 집중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시간 돼? 괜찮으면 나에게 써줄 수 있을까.”

경치가 멋진 곳을 발견했는데, 네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시원한 미소를 지은 미츠야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었지만 재고한다고 해도 답은 똑같았기에 유이는 굳이 대답을 정정하지 않았다. 기분이 조금 꿉꿉했지만 제안해준 사람의 성의도 있었고, 그게 아니라고 해도 기분이 꿉꿉하기에 더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자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울한 상태에서 우울한 노래를 들으면 그 감정이 더 커지는 것처럼, 지금 이 상태에서 집에 들어가는 건 그리 유쾌하지 못한 작용을 할 게 분명하다. 무엇 보다 미츠야가 데려다주는 곳은 언제나 환상적이었기에, 그녀는 이번에도 조금의 기대감을 가지고 학교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학교가 끝나고 반 밖으로 나서자 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츠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일찍 끝난 건지, 그는 전화기를 꾹꾹 누르며 문자를 보내는 듯 보였다. 유이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가가서 그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러자 그의 시선이 바로 그녀의 쪽으로 향했다.

“미츠야, 일찍 끝났나 보네?”
“응. 종례가 없어서 빨리 끝난 거 있지. 갈까?”

미츠야가 데리고 간 곳은 학교 뒤쪽에 세워진 바이크 앞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유이가 바이크를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 바이크 타고 갈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그가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주며 씩 웃었다. 바다에 가자. 후덥지근한 여름날의 바람을 닮아있었다. 더운 날을 식혀주는 것처럼, 마음속이 환기되며 답답했던 것들을 탁탁 털어버리는 웃음.

바이크는 몇 번 타본 적 있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올라탄 그녀가 앞에 있는 미츠야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허리를 잡는 게 조금 쑥스럽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제대로 잡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기에 유이는 쑥스러움은 잠시 저 멀리 던져두었다. 그러나 귀가 살짝 붉어지는 건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처럼 귀의 붉기도 조절할 수 있다면 너무나도 좋겠지만 그건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체의 신비란. 속으로 작게 중얼거린 유이가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는 바람에 눈을 조심스럽게 감았다. 얼굴이 차갑게 느껴진다. 귀가 똑 떨어질 것처럼 감각이 없었고, 머리카락이 날카롭게 얼굴을 두드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은 한결 편안했다. 씁쓸한 감정이 뭉쳐있는 속을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 열기를 식혔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감정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점점 식더니 어느 순간부터 뜨겁지 않게 느껴졌다.

도착한 바다는 무척 고요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장소인 건지, 그곳에 존재하는 거라고는 그들과 바이크 한 대가 전부였다. 물이 부드럽게 밀려오며 하얀색 포말을 그렸고, 바다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모래사장만이 남았다. 사람들이 자주 오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해변에는 그 흔한 쓰레기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자연 한 가운데에 있는 것만 같아서 유이는 속을 갑갑하게 만들었던 감정들을 하나둘 버릴 수 있었다. 마치 파도가 스치고 지나간 모래사장처럼, 모난 곳이 무너져 내린다. 만약 이게 미츠야의 위로라면 아주 훌륭하게 그 역할을 다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때?”
“너무 좋아. 사람도 없어서, 약간 비밀 장소 같기도 하고. 바람도 상쾌하고, 날이 좋아서 그런가? 바다도 예뻐. 이런 곳을 어떻게 안 거야?”
“가끔 답답할 때 오는 곳이야. 여기가 너에게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아까 봤을 때,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했어. 그리고 여기를 어떻게 알게 된 거냐면… 이런 말은 쑥스럽지만, 옛날에는 좀 방황했거든. 그럴 때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서, 비밀장소가 꽤 많아. 괜찮으면 다음에 다른 곳도 같이 가보자.”
“응…, 고마워. 네가 말한 것처럼, 나 기분이 조금… 안 좋았거든.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잘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모든 걸 망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고. 사실 나 그 애가 자꾸 눈에 들어와. 걔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그 여자친구한테 실례잖아. 마음은 거의 정리했고, 친구로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근데 오늘 학교에서 그 애를 보니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더라.”
“유이.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사람 감정이라는 게 다 그런 거잖아. 쉽게 잊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랫동안 속에 남아있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해. 그 애를 아주 많이 좋아했으니까 그 잔재가 남아있는 거 아닐까. 게다가 학교에서도 자주 마주치니까, 잊을 틈도 없을 거 아니야. 너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고, 조금 실수해도 괜찮아. 모든 게 망하진 않을 거야. 나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 거라면 난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

오빠 같아. 유이는 어른스러운 그 말에 괜히 바다를 향해서 시선을 던졌다. 그녀에게 이런 위로를 해주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로의 말이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는 건 그가 유일했다. 한 마디에 너무나도 쉽게 안심하는 스스로가 웃기다가도 다정한 위로에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다. 하지만 멋진 위로를 받았기에 울고 싶지 않아서, 유이는 괜히 주먹을 꽉 쥐고는 허공을 향해 쭉 뻗었다.

“음! 최고의 위로였어. 역시 시무룩해 있는 건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음, 괜찮으면 내가 아는 디저트 카페 가지 않을래? 멋진 곳을 소개해준 답례로 살게.”


오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 분명한 하루였다. 고요한 바다를 바라본 것도, 쓰레기가 없는 해변도, 함께 먹은 디저트까지. 디저트 카페를 갔다가 다시 바이크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유이는 미츠야와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나눈 후, 먼지 묻은 몸을 씻어냈다. 부들부들한 잠옷을 입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니 오늘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람을 맞으며 바이크를 탔던 것도 좋았고,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미츠야와 대화한 것도 좋았다. 물론 디저트 카페 역시 좋았으나, 앞의 두 일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기분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채고 바다로 데려다준 미츠야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작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어떨까. 가장 먼저 떠오른 모습은 여태껏 봐온, 상냥하고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모두에게 친절한 미츠야 타카시. 너무나도 쉽게 그려지는 그 모습에 유이는 사라졌던 답답함이 다시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모든 사람에게 그녀에게 해줬던 대로 해준다고 상상하는 순간 이름을 알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이 속에서 꿈틀거렸다.

나, 방금 왜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했지? 순간적으로 느낀 불쾌감에 유이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속이 미묘하게 울렁였다. 그냥 미츠야가 좋은 사람이라서, 가장 친한 친구의 자리를 뺏기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가? 아니, 미츠야가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조금 이상했다. 이건 마치 치후유가 보는 순정 만화에나 나올 법한, 주인공이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모양새처럼 보였다. 나 설마, 미츠야를 좋아하는 거야? 조금은 황망한 어투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 이후, 유이는 꽤 많은 생각을 했다. 정말로 미츠야를 좋아하게 된 건지,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그 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미츠야가 조금씩 더 눈에 밟히기 시작했고, 첫사랑이던 그 애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전에 느꼈던 미묘한 기분마저 사라졌을 때쯤, 유이는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미츠야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가 해주던 말과 함께 보낸 시간, 아무렇지 않게 행하던 배려가 머릿속에 머물렀으며 자주 보고 싶어진다. 좋아하지 않으면 이런 생각이 들 리가 없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며 적색 경고음을 울렸다. 더 이상 회피할 생각은 말라며, 분명하게 마음을 알려온다.

아키바 유이는 미츠야 타카시를 좋아한다. 그녀는 모두가 잠든 새벽, 조심스럽게 그 문장을 내뱉었다. 그의 상냥한 모습과 담대한 모습을, 그리고 다정한 배려가 묻어나오는 말과 행동을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됐다고.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었기에 고민의 시간 끝에 나온 인정으로 인해 동요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미츠야는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결국은 그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리고 과거의 그 생각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결국 유이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텅 빈 방에서 여린 목소리가 작은 목소리로 튀어나왔다.

“미츠야…. 미츠야 타카시. 타카시.”

고작 이름 한 번 부른 건데 낯이 불에 덴 듯이 뜨거웠다. 잠시만. 아, 이건 너무… 부끄럽잖아! 홧홧한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혀보며 괜히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린 그녀가 침음을 흘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설마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미츠야의 이름을 읊조리는, 순정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짓을 내가 한 거야? 그래도 한번 불러보고 싶었는데. 아니, 하지만 이건 좀… 그러니까 좀, 부끄럽잖아! 스스로와 아웅다웅 다투던 유이가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냥 자자, 더 깨어있는 게 손해인 것 같아. 그러고는 잠의 수마에 몸을 맡겼다.

마음을 인정한 후에 모든 것이 마무리될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유이는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미츠야에게 어떤 방식으로 마음을 전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좋아하는 감정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그의 마음이 아직 여전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이걸 그에게 전한다는 것은 조금 꺼려졌다. 저번에 겪은 거절이 뇌리에 깊이 각인된 탓도 있었고, 유이는 자신이 미츠야에 비해서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미츠야가 보여준 모습들에 비해서 유이가 그에게 보여준 모습은 전혀 멋지지 않았고, 괜히 그에 비해서 제가 모자란 것처럼 느껴졌다. 연인이라는 관계로 더 가까워지다가 초라한 나에게 실망하면 어쩌지. 유이는 걱정했다. 미츠야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그만큼 본인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다. 미츠야는 상냥한 오빠에다가 멋진 수예부 부장이었고, 그와 동시에 믿음직스러운 도쿄 만지회의 대장이었다. 그러나 유이는 그저 도서부 부원일 뿐이다. 미츠야의 이름 앞을 장식하는 찬란한 수식어와는 다르게 유이의 이름 앞에는 그저 도서부 부원, 이 세 단어가 전부였다.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아는 저도 이렇게 떨고 불안한데, 미츠야는 도대체 어떻게 용기를 낸 걸까. 쉽사리 나지 않는 용기에 주저하다가도 미츠야의 상황이 떠오른 유이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내어 그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그래, 이미 충분히 오랜 시간을 끌어온 일이다. 그러니 결론이 난 지금, 제대로 된 답을 전해야 했다. 답이 정해진 이상 시간을 끄는 건 못 할 짓이었다.

새해가 시작되는, 길에 눈이 한가득 쌓인 1월의 어느 날에 유이는 미츠야에게 연락했다. 시간이 괜찮으면 오늘 전에 그 공원에서 볼 수 있냐는 말에 그는 흔쾌히 허락의 말을 전했다. 유이는 조금은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벤치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 정리해둘 수 있었다.

미츠야는 그런 유이를 발견하고 벤치로 다가갔다.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상황에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저번과 똑같은 상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풀어내며 발걸음을 옮긴다. 한 걸음씩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귓속에서 뛰는 것처럼 시끄럽게 울렸다.

“미츠야.”

제 앞까지 다가온 익숙한 신발에 고개를 든 유이가 여느 때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불렀다. 꽤 오래 기다린 건지, 얼굴이 새빨갰다. 그녀는 눈을 반달처럼 휘어서 웃으며 일어났고, 미츠야와 눈을 맞추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바쁠 텐데 불러서 미안해. 할 말이 있는데, 꼭 오늘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그는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감적으로 유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지난번 고백에 대한 답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정말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과 함께, 미츠야가 유이의 입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절일까 봐 듣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런데도 묘한 기대감이 일었다. 무슨 답이 나오든 간에, 그들은 더 이상 옛날의 관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은 분명했다. 잔뜩 긴장한 기색이 드러나는 미츠야에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처럼 깨끗하고 포근한 웃음을 지은 유이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타카시, 좋아해.”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유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정말 좋은 사람인 거 알고, 그에 비해서 나는 한참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네가 다치면 치료해주고, 기쁠 때도 힘들 때도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조금 쑥스러운 건지 잠시 말을 멈춘 유이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미츠야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며, 결심한 듯이 단단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이런 나라도 좋다면 잘 부탁해!”

미츠야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놀란 얼굴로 유이를 바라보며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언제 놀랐냐는 것처럼 차분한 얼굴로 되돌아와서,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유이가 좋아하는 다정한 웃음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향했고, 조금은 기쁜 듯이 빠르게 입을 연 그가 이야기했다.

“고마워. 용기 내서 이야기해준 것도, 내 마음을 받아준 것도. 나도 부족한 점이 정말 많지만, 우리 서로의 부족한 점을 서로가 보듬어주자. 서로의 빈 부분을 함께 채워나갈 수 있을 거야. 정말 좋아해, 유이. 잘 부탁할게.”

손은 따듯했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유이는 추위 대신 온기를 느꼈다. 비단 손뿐만이 아닌 한겨울의 칼바람도, 서늘한 공기도, 심지어 발자국이 잔뜩 새겨진 눈길마저도. 온몸을 덮치는 온기가 마음 한구석을 차곡차곡 채웠다. 좋아해.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해. 조금은 쑥스럽고 어색한 고백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5월의 어느 날, 신사에서 자신을 도와준 미츠야의 다정함에 짝사랑에 지치고 너덜너덜해진 제 마음이 이끌린 게 아닐까. 그래서 첫사랑이 끝난 날, 다정한 위로와 함께 건네어진 조심스러운 고백에 쑥스러워하고 간질거리는 감정을 느낀 게 아닐까. 봄에서 겨울로, 오랜 시간을 걸쳐 이루어진 마음에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유이는 일부러 더 환하게 웃었다. 기쁜 날 괜히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미츠야가 좋아한다고 한 웃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기에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밝게 웃었다.

한겨울. 곳곳에 쌓여있는 눈과 살결을 에는 추위, 금방이라도 베일 것처럼 불어오는 칼바람. 꽃을 보기도 힘들고 푸릇푸릇한 나뭇잎은 전부 떨어져 버린 애처로운 계절. 유이는 그 계절을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흐드러진 꽃이 핀 계절을 사랑하지 않기란 어려웠기 때문에.

(11,021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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